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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Jul 08. 2022

잃어버린 3월을 찾아서 : 새 시대의 설계수업

10호_건축과 피크닉_특별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I

게재 : Vol.10 건축과 피크닉, 2020년 봄

 

 

1. 잃어버린 3월


변수가 튀어나오길 거듭하며 이제는 예상 불가능한 국면으로 향하고 있는 코로나-19와의 전쟁. 진정되었나 하면 사회의 그늘과 엮여서 다시 불이 붙는 걸 보고 있자니 이 상황이 블랙 코미디 같아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1월 말까지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 장기화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해외여행을 취소하고 공연 티켓 몇 개를 버리면서도 이를 여름에 보상받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상을 구성하던 많은 요소와 삶의 활동들을 미루는 것은 언젠가 사태가 끝나리란 기대하였기에 가능했다.


휴학생으로서는 크게 체감하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의 3월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지난겨울의 끝을 기억하지 못한다.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재난 문자와 함께한 한 달은 너무도 비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개강도, 술자리도 없었으며 봄바람을 맞으며 벚꽃 구경을 할 수도 없었다. 매년 벚꽃과 함께 찾아오던 중간고사 또한 없어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벚나무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좋으면서도 역시 어색하다.



카페로 피크닉


야속하게도 3월 중순, 꽃이 피고부터는 안 나가고는 배기기 힘든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학교에도 못 가고 꽃놀이도 못 가는 상황에 우리는 봄을 맞으러 카페로 나간다. 일 년을 돌아서 온 봄을 맞이하는 최소한의 예우다. 좁고 폐쇄적인 공간이라면 방문하기 곤란하겠지만 다행히 부쩍 따뜻해진 공기에 문과 폴딩 도어를 활짝 열어젖힌 곳이 많다.


탁 트인 창과 카페의 전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신록을 내다본다. 주위에는 노트북과 책을 펼쳐두고 온라인 강의를 듣는 듯한 사람, 조곤조곤 근황을 나누는 사람들,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러 온 듯한 사람 등이 각자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문득 이 모습 이 잔디밭에 저마다 돗자리를 펼친 모양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외가 아닌 곳에 돗자리 대신 테이블을 근거로 만든 사유 공간이란 점은 다르지만, 목적과 형태는 꽤 비슷하다.



2. 질병관리본부의 비가역 선연, 새로운 일상을 위한 준비


초반에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던 중국 지역으로부터의 유입에 대한 조치로서, 상황이 심각해지고부터는 집합 자체를 지양할 필요가 생김에 따라 대학교의 학사 일정이 미뤄졌다. 개강 연기, 일시적 온라인 강의 시작, 1학기 전체로 확대. 휴학생으로서 안전한 집에 틀어박혀 지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피부에 와 닿기도 힘든 이야기들이다. 어렵게 만난 친구들과 근황을 주고받고 무산되어 버린 수많은 계획과 기대를 듣고 있다 보면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이실직고하자면 온라인 강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한 번쯤 참여해봤으면 해서 내심 아쉽다고 생각했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까, 나중에는 ‘나 때는 말이야~’ 라며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생각도 이제는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2020년을 다시 시작하자는 농담과 함께 무색해진 듯하다.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생활 속에서 감염병 위험을 차단하고 예방하는 방역 활동이 우리의 일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문장이 말하는 비가역성은 마스크와 손 소독제가 여느 때처럼 사태 종결 후 서랍장 안으로 다시 들어갈 일이 없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려면 언제까지고 삶의 활동들을 멈추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 마스크를 쓰고 30초 손 씻기를 일상화하면서도 식료품을 사고 경제활동을 하고 일터로 나가야 한다. 새로운 일상을 위한 준비 과정의 첫 순서는 대학교였다.


처음에는 도서관 운영 시간을 단축하고 일부 건물의 출입을 일시적으로 통제하는 수준의 조치가 취해졌으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고 결국 “심각” 단계로 격상됨에 따라 1학기 전체를 온라인 강의로 시행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측 또한 질병관리본부의 집단행사 자제 권고에 의거하여 3월 3일부터 설계실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공고했다. 개강 후 첫 7주간 학교의 모든 이론 수업은 원칙적으로 대면 강의가 금지되었고, 실기 수업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어쨌든 설계는 지속되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설계 스튜디오의 수업 진행 방식은 담당 교수의 재량에 맡겨졌다. 기존의 방식대로 세미나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스튜디오는 온라인으로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화상 수업을 위해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고려대학교 블랙보드(Blackboard)의 화면 공유 시스템, 구글 행아웃(Google Hangout), 줌(Zoom)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은 화상 회의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다수 인원의 동시 화상 통화와 화면 공유 기능을 지원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스튜디오에 모여 발표-크리틱을 주고받는 수업 방식을 온라인상에서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1) 온라인 설계 수업

블랙보드 화면 공유 시스템의 경우 공유하는 파일 위에 참여자 모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는 크리틱을 하며 크리틱 저널 대신 발표자의 PPT에 직접 스케치를 남기고, 스튜디오의 다른 학생들은 실시간으로 그를 지켜보는 식이다. 자유로운 스케치를 위한 태블릿 등의 도구만 있다면―마우스로 그린 다이어그램은 교수의 그림 실력이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피차간 곤란할 것이다― 오프라인과 다를 바 없이 빠르고 명확하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으며 학생이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쉽다. 발표자는 교수와 일대일로 비교적 편안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서도 다른 학생들이 이를 참관하는 것 또한 오프라인에서 멀찍이 볼 때보다 쉽다. 데스크 크리틱(desk critic)과 발표 수업의 장점을 모두 갖는 방식이다. 다수의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학생이라면 더더욱 반가운 환경 이리라. 교수 또한 크리틱 중 참고자료를 인터넷에서 바로 찾아 화면 공유로 빠르게 다 같이 볼 수 있으므로 수업 진행이 한결 편하다. 


이 경우 손해를 보는 것은 모델 작업을 주력으로 하는 학생들이다.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장면을 연출하더라도 이를 화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실물을 직접 돌려가며 설명하는 것만큼 효과적이기 어렵다. 모델을 만드는 것 자체도 제도판과 커다란 쓰레기통이 갖춰진 설계실을 사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훨씬 번거로워진다.


(2) 대지조사

대지 조사(사이트 리서치, Site Research)는 설계 수업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유일한 야외 활동으로서 야외 활동 최소화 방침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이에 스튜디오들은 대지 조사를 구글 맵의 로드뷰(Road view) 기능을 통해 디지털상으로 진행했다. 구글 맵 화면을 공유해 시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대지와 주변 환경을 살펴보는 식이다. 물론 대지를 직접 방문해 흙을 밟고 공기를 느끼고 분위기를 아는 것은 대지의 입지 파악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단체 방문은 지양하더라도 학생들의 개인적인 탐방은 권해졌다.


(3) 중간/기말 크리틱

기존 공고에서는 중간고사를 교과목 담당 교수의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시행하도록 했었으나, 4월 중순 학교에서 나온 방침에서는 강의실에 모여 치는 시험을 금지하고 이를 온라인 시험 또는 과제로 대체하도록 했다. 따라서 건축학과 설계 스튜디오의 중간/기말 크리틱 또한 수업과 마찬가지로 화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A0 두 장 사이즈의 pdf 패널을 출력해서 붙여놓고 넓은 세미나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발표를 듣는 것보다 ppt 형식으로 정리된 시각 자료를 넘겨 가며 듣는 것이 발표자의 프로젝트 의도를 이해하기에 더 좋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밤을 새웠을 크리틱 전 며칠의 여파로 꾸벅꾸벅 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모니터 뒤에서라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이때도 모델을 통해 프로젝트를 어필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근심거리가 생긴다. 오프라인 크리틱이 아닌 이상 패널 앞에 재질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모델을 놓아둘 수도 없고, 메인 샷을 아무리 맛깔나게 뽑아내더라도 실물의 감흥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게다가 디지털상의 시각 자료라면 3D 렌더링이 특기인 사람의 본진이나 다름없다. 한 학기를 쏟아부은 프로젝트인 만큼 평가자들에게 좋은 평가, 흥미로운 의견을 들으려면 한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므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일부 스튜디오에서는 아예 학기 중 스터디 모형만 실물로 만들고 기말 크리틱에서는 모델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기도 했다.



그래도 설계실은 갖고 싶어


설계가 실기 수업에 가까운 만큼 처음 온라인 수업이 결정되었을 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온라인 설계 스튜디오는 의외로 문제없이 오프라인에서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라면 ‘설계실이 없다’ ―설계 스튜디오가 ‘설계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는 것 자체인 듯하다. 각자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설계를 진행하므로 개인 프로젝트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겠지만, 설계실은 한 학기 간의 스튜디오 수업에서 작업 공간으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열댓 명 남짓한 인원이 (대체로) 좁은 공간을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고, 대지 모형을 만들고, 과제 기한을 묻고, 설계를 하기 싫어하고, 밤새 우드락을 자르며 잡담을 나누다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그 학기의 기억이 된다. 이것이 설계 스튜디오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극단적인 경우 같은 설계반 학생들의 얼굴조차 모른 채 학기를 끝낼수도 있다는 점은 많이 아쉽다. 또한 타인에게 배우는 것은 데스크 크리틱에서의 발표 및크리틱 내용뿐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오가며 어깨너머로 보는 작업물들을 통한 것 또한 많다. 자습에 가까운 온라인 수업에선 설계가 막혔을 때 의자에 드러누워 있다가 옆자리 사람은 같은 맥락에서 무엇을 보고 집중했는지를 살피고 물어볼 수 없다.



이 시국에 차선책으로 ‘카페 피크닉’이라도 가 보는 건 어떨까.



3.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기온이 올라갈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했던 최초의 기대는 이제 까마득할 정도로 부질없어졌다. 낙관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일상을 회복할 궁리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시적이었던 개강 연기와 온라인 개강이 최소 한 학기로 확대된 만큼 이 변화 또한 거시적인 흐름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확실히 세기말 즈음 사람들이 상상했던 2020년대의 사이버 펑크적 미래상에 비해 실제로 도래한 2020년의 풍경이 너무 덜 화려하긴 했다. 기술은 과거 세대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자가용 비행선까지는 아직보급하지 못했지만) 발전했는데 적어도 강의 정도는 온라인으로 멋들어지게 해야 할 것 아닌가. 구글맵 로드뷰를 통한 디지털 건축 기행은 퍽 21세기에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기존 수업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조심스럽게나마 한 발 더 내디뎌보자. 온라인 설계 수업이 정착된 후에는 무엇이 더 가능해질까?  화상 회의 기능이 더 발전하고 장비가 보급된다면 그때야말로 영화에서 보듯 홀로그램으로 교수와 대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는 ―현 온라인 수업의 아쉬운 점 중 하나인―미세한 비언어적 표현을 주고받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 사물을 스캔하여 그 형체를 디지털상으로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될 경우 실물파 학생들에게도 핸디캡이 덜하다.


온라인 수업이 임시방편으로 사용되는 현재 상황을 넘어 정착하고 보편화하는 단계가 된다면, 시간적 제약에 대한 고려 또한 새로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 혹은 설계실이라는 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현재에도 정해진 수업 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은 유지되고 있다. 이것이 서로 조건만 맞는다면 언제든 화상을 불러낼 수 있는 환경에서도 필요한 것인지, 아니라면 수업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에 더 적합한 안이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간’적 제약 또한 디지털 문법상에서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오프라인 수업과 현재의 온라인 크리틱에서 학생들은 자기 반의 크리틱만을 지켜본다. 오프라인 수업에서야 시·공간적 문제로 중간/기말 크리틱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당연했던 것이지만, 온라인 설계실에서는 그 사유가 통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크리틱을 화상 구석에서 지켜보는 것 정도는 설계반과 학년 구분을 아무리 넘어가더라도 수업 진행을 방해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교수와 나의 화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다는 점은 사생활 및 초상권 이슈와 엮일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일대일 이외의 다수가 언제나 참관 가능한 환경이라면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다이어그램을 끄적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의 ‘사적인’ 경험을 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이번에야 첫 시도인 만큼 가지각색의 시행착오가 속출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 과도기를 거치고 나면 적어도 대학교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밤을 새우다 새벽 1시쯤 치킨을 시키자고 꼬실 사람이 있는 설계반만큼은 있었으면 좋겠다.


Special Thanks to ― 온실 속 휴학생에게 설계반 최전방 이야기를 들려준 YDJ, CYJ.

사진제공 | 김정인          





WRITTEN BY

프로잡담러 I |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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