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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Aug 01. 2022

튀빙겐 관찰기

10호_건축과 로맨스_일상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F

게재 : Vol.10 건축과 피크닉, 2019년 겨울

 

 

[사진 1] 호헨튀빙겐 성에서 내려다본 튀빙겐의 남쪽


"와 이거 그냥 공짜 여행 아니야?!"


라는 순간의 판단으로 자기소개서, 그리고 독일에 가서 작성할 포트폴리오의 주제, 독일에 대한 나의 열정을 꾸역꾸역 적어 낸 지 어언 여섯 달 정도가 지났다. 고려대학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Global Leadership Program, 이하 GLP)은 한 달은 국내에서, 한 달은 해외 현지에서 어학수업과 문화특강을 듣는 강좌로, 국비 지원을 받아 독일 GLP의 경우 고려대학교가 현지에서의 교육비와 숙박, 비행기표를 제공한다. 돈은 없고, 여행을 가도 3~4일 만으로는 성이 안 풀리는 나에게 한 달이라니. 한 달. 머릿속으로는 이미 베를린의 펍에서 맥주와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기대를 가득 품고 지원서를 쓰고, 면접에서는 건축을 주제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오겠다 장담한 후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달 동안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작은 시골 도시 튀빙겐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한편 난생처음 들어본 적 없는 독일어를 두 달 동안 배우고 현지에서는 유럽연합 정치와 역사, 인권 수업을 듣는 만큼 결국 내가 상상하던 탱자탱자 놀고먹는 '여행'은 아니었다.


"튀빙겐이 어딘데?"


 아무것도 모르고 지원한 나는 그게 어딘지 몰랐고 Tubingen의 ü도 읽을 줄 몰라서 이름도 못 읽었다. 독일이면 베를린, 뮌헨, 프랑크푸르트 등 사람들 복작복작한 대도시도 많은데 왜 튀빙겐인가. 찾아보니 인구는 고작 9만 명이 채 되지 않고 그중 3할은 튀빙겐 대학교(Eberhard Karls Universität in Tübingen)의 학생들로 작은 대학 도시이다. 독일 하면 생각나는 첨단기술은 오간 데 없고 시내에서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안테나가 터지지 않는 이곳은 20~30분 정도만 버스를 타면 광활한 밭이 나온다. '아, 큰일 났다.' - 현지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같이 온 고려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려대가 우리를 이곳에 가둬버렸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것은 구도심에 있는 성당(Stiftskirche St. Georg) 하나와 언덕 위에 있는 호헨튀빙겐 성(Schloss Hohentübingen)이 있다. 성이 있는 언덕 아래, 성당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던 나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가이드북에서 본 모든 명소를 다 가볼 수 있었다. 가이드북이라 해봤자 튀빙겐을 소개하는 부분은 달랑 2장이 고작이었으니, 그 이후로는 순전히 내 눈으로 도시를 감상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재밌는 감상의 대상이란 빽빽하게 전시된 도시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감질나게 보여주는 이런 마을임을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사진 2] 화창한 날 구도심의 성당


튀빙겐은 옛날부터 튀빙겐 성과 도시의 중심인 구시가지(Altestadt)가 있는 강 북쪽과, 비교적 뒤늦게 개발된 강 남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유일한 대중교통이 버스이기 때문에 튀빙겐 대학교가 각 학생에게 한 달 정기권을 나눠줬지만, 바보 같은 나는 강의실까지 버스로 5분밖에 안 걸린 다는 사실을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에 깨달아버려서 매일 아침을 걸어 다녔다. 강의실까지 걸어서 20분 정도였기 때문에, 몸은 좀 피곤해도 와중에 도시의 이모저모를 뜯어 볼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이렇게 학교를 오가며 써 내려간 나의 머릿속 가이드북을 잡담과 나눈다.


[사진 3] (위) 카페테리아에서의 점심


[사진 4] (아래) 집으로 돌아가는 통학길


오래된 집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튀빙겐에서 짐을 풀고, 첫 등교를 한다. 가이드북에서 튀빙겐을 가리켜 동화 속과 같은 도시, 낭만적인 목조 가옥들이 가득한 지방 도시 등으로 그려내곤 해서 기대를 가득 담고 집을 나섰다. 실제로 튀빙겐은 새로 지어지는 건물보다는 이미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들이 많으며, 지역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목조 가옥들 또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강 북쪽의 구도심을 걸으면 마치 중세시대의 도시를 걷는 듯하다. 대부분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에 사는 한국에서 온 나로서는 신기한 풍경이면서도, 왜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 짓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


몇백 년이 넘은 건물을 찾는 것은 튀빙겐에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 의미 있는 사실은 이렇게 서 있는 건물들이 보존을 목적으로 남겨진 것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기능만을 바꾼 채 몇백 년 동안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어떤 건물은 작은 호텔이 되었고, 어떤 건물 아래에는 H&M이 들어섰다. 한편, 이 건물들 앞을 지나가면서는 방학 때마다 새롭게 바뀌는 안암동의 상가들처럼, 다시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고 다른 가게로 바뀌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집이 낡으면 철거한 뒤 새 건물을 짓고 다시 분양하는 것이 보통의 일일 것이다. 재개발로 이전의 건물들이 광범위로 헐리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외장을 한 상가들과 치솟는 아파트가 올라가야 우리 속이 팍 풀릴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곳 튀빙겐 사람들은 100년이 넘어가는 이 집들을 계속 고쳐 쓰면서 사용할까, 또 그렇게 지어진 집들에서 살면서 이 동네는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았다.


[사진 5] 네카강을 따라 있는 오래된 주택들

 

1. 삐걱거리는 소리

먼저 이 건물들을 보자면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때도 있지만 주로 목재와 석재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이때 전통양식의 목구조가 즐겨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머물던 게스트 하우스 또한 네카강(Neckar Fluss) 인근에 있는 오래된 주택 중 하나로, 0층에서 내 방이 있는 1층(독일은 건물의 맨 아래층은 우리처럼 1층이 아닌 0층이다.)까지 올라갈 때면 끊임없는 삐걱거림을 들어야 한다. 끼이이익. 끼익. 쿵쿵.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서 올라갈 때면 이러다 계단 하나 부숴버리는 것이 아닌가 조심하면서 올라가다가도, 그 수 없는 세월 동안 여기서 계단 노릇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한 달 동안 공부한 대학 건물 중에서도 오래된 건물들은 이렇게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것이 많았다. 우리나라처럼 캠퍼스 한 곳에 건물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15세기부터 새로운 건물이 필요할 때마다 도시 곳곳에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마다 건축 양식과 재료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그중 독일어 수업이 열린 어학 과정 건물의 경우 매우 작은 건물이었는데, 목재와 콘크리트에다가, 후에 보강한 것인지 철골까지 섞여 있는 듯해 보였다. 바로 옆길에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책상이 두두둥 흔들리기도 할 만큼 때로는 연약해 보였지만, 이 건물은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흔들려오며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평소에 콘크리트가 목재보다 더 믿을만하고 튼튼한 재료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튀빙겐에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건축재료의 물리적인 성질을 따지기 전에, 아무래도 이들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우리나라에 있던 콘크리트 아파트들이다.


[사진 6] 호헨튀빙겐성에 사용된 목구조


이렇게 지어진 목재 중심의 건축물들은 내 생각처럼 수명이 짧거나 약하지 않았다. 튀빙겐을 돌아다니면서 새 건물을 짓는 건설 공사를 본 적은 거의 없었고, 주로 이미 있는 건물에 리모델링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 경험은 아주 단편적이지만,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 계속 고쳐 쓰는 것이 독일의 오래된 주택 수명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주택의 평균수명은 20여 년 정도인 것에 비해 독일 주택의 평균수명은 약 80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4번 주택이 갈릴 때 독일에서는 평균적으로 한 건물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에는 다른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주재료로 목재를 사용하고 여러 번 개보수하는 튀빙겐의 모습 또한 그러한 결과의 원인일 것이다.


[사진 7] 튀빙겐의 시청사(Rathaus)


목재는 한편으로 친환경적인 재료이기도 한 점 또한 내가 주목한 점 중 하나다. 이 집들이 처음 지어질 때는 그저 근처의 재료가 나무가 많으니 그것들로 집을 지었을 테지만, 목재가 가지는 지금의 의미는 사뭇 다를 수 있다. 독일에 잠시 사는 것임에도 독일 사람들은 환경에 민감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면지를 엮어서 만든 공책을 우리를 위한 환영 선물로 주는가 하면, 마트에서 파는 식료품 대부분은 유전자 조작 식품 비사용, 열대우림 보호, 동물권 보호 등 다양한 마크가 기본 한두 개 이상은 우다닥 붙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상품들을 통해 독일인에게 '환경보호'가 가지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이러고 보면, 굳이 긁어서 부스럼 만들듯 새 건물을 지을 것이 아니라 원래 건물 잘 닦아서 쓰자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천연 재료인 나무로 만들었다니, 이보다 더 완벽하기 어렵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건설업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산업이다.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철근이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오고, 시멘트는 또 얼마나 캐서 나르는가 하면, 얼마나 많이 땅을 파고 나무를 베는가. 또 그런 영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다. 건설이 환경에 주는 영향이라 하면 단순히 건물을 올리는 과정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건물의 유지 보수에도 적지 않은 자원이 소비된다., 마지막으로 건축물이 폐기되는 과정에서도 소음공해와 대기오염은 물론이고, 한 번에 배출되는 처리가 곤란한 건설폐기물과 자원 낭비 모두 한 건물이 만들어내는 환경오염 요소들이다. 이를 알고 나면 적극적인 재사용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환경적 이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먼저 목재는 구하기 쉽다. 유지보수 과정에서 재료를 찾기 위한 노력과 재료를 필요한 곳으로 운송할 때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절감할 수 있는 측면이다. 또한 무엇보다 폐기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포함한 여타 화학제품들과 다르게 분해와 처리가 쉽기 때문에 환경에 부담이 덜하다. 설사 건물 전체를 부술 때 나오는 건설 폐기물들이 처리 과정에서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목재의 경우 자연분해가 가능한 유기물이기 때문에 철거에 따라 발생하는 환경 부담이 적다. 즉, 그들이 이처럼 목재를 사용하는 것은 건물을 지을 때뿐만 아니라, 건물의 건설부터 유지, 철거까지 고려하는 생애 주기의 관점에서 봤을 때 환경 보호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다


2. 유행과 맥락

건축물에도 분명 유행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젠가 유행한 컨테이너를 사용한 건축물을 생각해보았다. 건대의 커먼 그라운드, 서울숲의 언더스탠드 에비뉴, 고려대의 파이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우수수 지어졌다. 당시에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이제는 별로 새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내가 볼 때는 가끔 '그때' 지어진 건물이겠거니 하는 인상을 남긴다. 건축물이 오랫동안 서 있기 위해서 재료도 중요하지만, 미학적 측면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료가 아무리 좋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국 사용하는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을 할 것이다. 이런 면은 아무래도 수치로 나타내기 어려워 무시되는 것 같지만 분명 우리는 여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유행을 따라가면서는 오래 서 있는 건물을 만들기 쉽지 않고, 유행이 지난 건물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 또한 편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다시 튀빙겐을 본다. 시청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이들을 붙잡고 있는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물어보았을 때 이 지역의 전통 건축양식이라고 말한 목구조를 구조로 하여, 각각의 건물들이 나름대로의 변주를 통해 거리를 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리의 모습은 한순간 휩쓸고 지나가 버리는 유행보다는 계속 그곳에 자리 잡아 장소를 규정하는 분위기에 의해 형성된다. 네카강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작은 집들과 상점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성을 찾는다.


이렇게 도시는 하나의 맥락(context)에 묶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네에서 골목을 걸으면서 모퉁이를 돌아 둘러보더라도, 내 집 앞과 비슷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이러한 경험은 곧 '여기도 내 동네구나'하는 동질성으로서 연결된다. 결국 오래된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동질성은 물리적 환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 사이의 심리적 동질성으로 연결된다. 건축을 배우면서 하드웨어 그 자체보다는 건축이 형성하는 그 안의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 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오래된 건물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튀빙겐 중심에서도 아주 가끔 신식 건물을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모습이 아니라 주변의 맥락을 이어받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궁궐 옆에 고층빌딩도 좋고, 빨간 벽돌집들 옆에 아파트도 좋지만 이런 튀빙겐의 모습은 당연하면서도 낯설다.


사실 이러한 분위기를 한국에서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튀빙겐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같은 곳이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다르다. 튀빙겐과 비슷한 상황을 한국에서 찾아보자면 북촌이나 전주에 남아있는 한옥마을이 예시가 될 수 있겠으나,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국토가 황폐해지고 전후 급성장으로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장소는 보기 드물다. 독일보다 유행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 또한 하나의 분위기가 자리 잡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도시들은 변화 속에서 분위기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을 수도 있다.


[사진 8, 9] (왼) 광장에 위치한 목조건물. (오) 네카강 공원에서 바라본 북쪽 튀빙겐



“독일에서는 옷 살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왜요?”

 

이렇게 나름 복잡하게 생각을 해보면서도, 이유는 꽤 간단한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사람들은 유행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 아니, 둔감하다. 독일에 가기 전 어학 수업 선생님은 종종 독일에서 산 옷은 한국에 와서 보면 촌스러우니 사지 말란 소리를 하셨다. 선입견을 품지 않고 경험하면서 내 생각을 가져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말이 맞았다. 쇼윈도의 마네킹을 보면서 한국 학생들끼리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와.. 옷 입힌 거좀 봐..”

 

아무래도 그들의 관심사는 실용성과 가성비에 있지, 유행에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건물들도 이와 같아서 섣불리 유행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닐까.


3. 절약! 절약!

사실 다른 이유보다 '절약'이라는 말이 이렇게 오래된 가옥들이 서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오래된 집들이 밀집한 지역은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여기 독일에서 절약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될 만하다고 느꼈다. 독일인에 대한 편견 중에 절약이 항상 포함되곤 하는데, 내가 공부하고 있는 바뎀 뷔르텐베르크 주는 이곳 출신 사람들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이 ‘구두쇠’ 일만큼 독일 내에서도 절약으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그런 선입견을 품고 독일인들을 만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사람들은 본인들이 환경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재활용을 한다는 점을 매우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회용 컵조차 쓰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충분히 다시 쓸 수 있는 건물을 통째로 부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렇게 절약은 환경보호와 절약이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환경보호에 대한 관념이 독일 내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사진 10] 보증금을 환급받기 위해 모아둔 빈 병들


이런 맥락에서, 건물을 오래 쓰는 것 자체로 상당한 절약을 끌어낼 수 있다. 새로 짓는 것보다 리모델링이 훨씬 저렴한 것은 당연하다. 독일에서는 어떨지 잘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리모델링하여 건물을 사용할 경우, 새로 건물을 지을 때 적용되는 각종 규제를 따르지 않거나 완화되어 적용할 수 있게 되어있고, 좀 더 느슨한, 그래서 수익 측면에서 더 이익이 되는 이전 건축법을 따르도록 하기도 한다. 또 위에서 설명했듯 목구조에 기반한 특성상 필요한 때에 유지보수를 위한 부품을 구하기 쉽고, 콘크리트 건물과 같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가 적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새롭게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행정인력과 공사와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등 오래 한 건물을 고쳐가며 사용하는 것은 건축물의 생애주기 관점에서 봤을 때 지역 사회의 관점에서 또한 상당한 절약이다.



골목길과 돌바닥


튀빙겐의 시가지의 바닥은 대부분 매끈한 보도블록이 아닌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박혀있다. 캐리어에 온갖 흠집이 다 나고,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엇이든 박살이 나기에 좋은 꼴이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오는 도중 이미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학생이 돌바닥에 얼굴을 갈았다. 핸드폰이라도 떨어뜨리는 날에는 건사하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서 강화유리 액정필름을 팔거나, 우리나라처럼 액정 수리 업체를 차린다면 대박을 터트릴 것이다.


한편 지도를 본다면 튀빙겐의 네카강 북쪽의 구시가지는 좁은 골목길들이 이리저리 펼쳐져 있다. 처음 온 사람들은 길을 헤맬 수밖에 없다. 여기가 저기 같고, 방금 지나왔던 곳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 같기도 하다. 대체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도시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 이 골목길이 튀빙겐에서 건축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해져 잠시 길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해보며 사람들은 그 골목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보았다. 서울에 어느 정도 있어 본 외국인들은 종종 서울을 '골목의 도시'라고 묘사하곤 하는데, 튀빙겐의 골목은 서울과 달리 무엇이 특별한가.


1. 공유도로

튀빙겐에 오기 전, 2019년에 안암동 참살이길 일대의 도로 공사가 있었다. 인도를 넓히는 공사였는데 인도와 차도를 나누는 연석이 좀 더 낮아지고 색도 차도와 비슷한 색상으로 바뀌었다. 이에 이 좁은 일방향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인도에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다. 결국 차도와 인도가 분간하기 어려워질수록 차들은 속도를 줄인다. 옆살이 쪽으로 가면 인도와 차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차도와 같은 좁은 아스팔트 길 위에서 차와 보행자가 같이 다니는데, 이곳에서 속도를 내는 차를 본 적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없는 도로를 공유 도로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차는 보행자나 자전거와 함께 동등한 우선순위를 가진다. 즉 보행자와 자동차가 인도와 차도 같이 각각의 영역을 할당받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도로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된다. 이에 따라 자동차들은 속도를 줄이고 자연스럽게 조심해서 운전하게 되고 결국 보행자 중심의 거리가 형성된다.


튀빙겐의 구시가지는 대부분 공유 도로로 조성되어 있다. 옆살이와 다른 점을 짚는다면, 이곳은 차도 위로 보행자가 끼어드는 느낌의 옆살이와 달리 인도 위에 차들이 끼어드는 느낌의 길이다. 즉 원래 길의 주인은 보행자이고, 차들이 길을 빌리는 느낌을 준다. 언덕진 지형 탓도 있지만, 구시가지 거리에는 자동차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대부터 이곳이 튀빙겐의 중심이었던 탓에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요점은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어 자동차의 필요성과 숫자 또한 적다. 30분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가볍게 동네 한 바퀴를 돌 수 있고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을 간다고 하더라도 버스를 타고 10분을 넘지 않는다. 그렇게 자동차가 줄어든 거리에는 보행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길거리 연주를 하기도 하며, 음식점들이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기도 한다. 그러한 요소들 덕에 자동차가 이 도로로 올라오기는 더욱 부담스러워진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자동차가 없는 보행자들의 공간이 되며 단순히 걷는 것 이외에도 다른 활동을 하기 좋은 공간이 된다. 자동차가 물러남으로써 그 공간이 사람들의 활동으로 채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런 골목길은 다시 네카강 중앙의 공원까지 연결되어 충분한 야외 활동공간을 제공한다. 학생이 인구의 약 1/3을 차지하는 대학도시 튀빙겐의 이 골목길은 사색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차도가 사라진다면 보행자는 교통사고에 대한 걱정을 줄일 수 있고, 이러한 관심은 다른 활동으로 이어져 거리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연세대의 경우 사색하는 길을 위해 백양로의 차도를 없앴고, 최근에 지어지는 아파트 단지들도 안전과 생활 환경을 위해서 차도를 지하화하는 등 인도를 넓히고 차의 활동 영역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를 진행하는데 이러한 설계의 결과를 튀빙겐에서 미리 볼 수 있었다.


[사진 11]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


[사진 12] 거리에서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


2. 재밌는 거리

홍대나 건대 거리를 걸어본 경험을 떠올려보면, 도로를 따라 다양한 음식점과 옷가게가 즐비해 있고 그 길에서 갈라져 나온 골목들 또한 다양한 상점들이 즐비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반면에 테헤란로나 명동 대로를 걷는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의 경험은 그렇게 다채롭지 않다. 도시는 나의 시선을 따라 수평적으로 길게 뻗어있어야 나의 흥미를 끌 수 있다. 수직적으로 높게 올라간 고층 건물들은 그렇게 재미있는 요소가 아니게 되며, 효율성을 이유로 높게 올라간 건물들은 걷는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중심이 되는 길 하나에 모든 것들이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내 시야에 다 들어오는 것 또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요소이다. 내가 발로써 돌아다니기 전에 내 시야에 다 들어오는 것은 거리를 걷는 내 경험을 지루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골목길이 많은 곳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내 눈으로 다시 새로운 정보를 보는 재미를 준다.


튀빙겐에서 나의 통학 길을 떠올려보면 학교까지 가는 선택지가 참 다양했다. 그런 다양한 경로 때문에 첫 주는 구글 지도를 항상 켜고 다녀야 했지만, 계속해서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오는 상황에서 나는 좀 더 주체적으로 내 통학 길을 구성할 수 있다. 하늘이 맑아서 성당 사진을 찍고 싶다면 성당 앞으로 지나가고, 밥을 못 먹어서 빵집을 가고 싶다면 갈림길에서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등 여러 개로 갈린 갈림길은 지루함을 잊게 해 준다.


[사진 13, 14] 학교 갈 때에 마주하는 골목길들


그렇게 갈라진 골목길은 상당히 수평적이다. 건물들의 높이는 높으면 4층 낮으면 2층 정도로 애초에 높지도 않지만, 대부분 주거를 제외한 용도로 쓰인 1층에만 국한된다. 이로써 한 건물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건물은 빵집 건물, 저 건물은 서점 건물 정도로 1층의 프로그램으로만 그 성격이 정해진다. 만약 은행과 빵집, 서점, 옷집이 한 건물에 있고 내가 가려는 옷집이 1층에 있다면 나머지는 내 관심 밖이겠지만, 이렇게 늘어져 있는 동네에서 옷집을 가려는 도중에 빵집에서 뭔 빵을 만드는지, 은행이 문을 여는지, 서점에서 무슨 책을 파는지 나도 모르게 기웃거리게 된다. 그렇게 옷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옷집에 도달하는 수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어제와 다른 새로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마무리


그동안 살면서 너무 앞만 보고, 아니면 핸드폰만 보고 걸었던 게 아닌지, 한국에 와서야 생각해보게 된다. 큰 맘먹고 떠나는 여행이든, 그냥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통학 길이든 중요한 것은 목적지였지, 내가 있는 곳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그 과정은 무시해 온 것이 틀림없다. 반면에 튀빙겐에 살면서 얻은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목적지이자 내 집이었던 Neckarhalde 23번지라는 한 줄이 아닌 몇 장에 걸친 글을 필요하게 한다.


실상은 시간에 쫓겨 겨우 아침 통학 전철을 타는 게 내 생활이었고 결국에는 강의실에 와서야 졸린 눈을 뜨지만, 내가 잠든 그 사이사이에 보지 못한 우리네 도시의 모습 또한 한국에서의 일상 속에 숨어있던 것이 아닐까. 이는 어쩌면 유튜브보다 재밌는 움직이는 파노라마 일지 모른다.


[사진 15] 작고 퀴퀴한 내 방


사진출처│ 신동휘


  

  


WRITTEN BY

프로잡담러 F | 신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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