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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Aug 05. 2022

벽돌담 위에 커튼월 얹기, 레트로

12호_건축과 보름달_프로잡담

작성 : 프로잡담러 L

게재 : Vol.12호 건축과 보름달, 2020년 가을

 


분명 몇 년 전에만 해도 뿔테 안경이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촌스럽다고? 개화기 같은 철테 안경이 돌고 돌아 다시 트렌드로 떠오르는 시대, 레트로의 끝없는 재림.


최근에 이날치라는 아티스트의 노래에 푹 빠져 있다.중독적인 멜로디는 최근 바쁘디 바쁜 내 과제더미에 좋은 노동요가 되어준다. 누가 판소리에 베이스 반주를 섞어 넣을 생각을 했겠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뭐, 이런 개인적인 감상은 잠시 치워 두고, 문득 든 생각은, ‘아, 이제 판소리까지 거슬러 올라갔구나.’ 였다.



레트로. 


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과거회귀 본능은 결국 조선시대까지 닿았구나. 분명 몇 년 전 까지만 해도‘응답하라 1988’에 ‘슈가맨’, ‘잔나비’가 빵 뜨면서 거슬러 올라가도 7, 80년대정도였는데 말이지. 이제 가사에 ‘얄리 얄리 얄라셩’이 나와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분위기도 레트로 조명도 레트로. 화질도 레트로 감성도 레트로. 어떻게 보면 바나 노포도 레트로 그 자체이며 이젠 위스키도 레트로라 할 법도 하고. 아무튼 레트로에 한국 유행이 절여지다시피 했단 것은 잘 알겠다.


복고풍 하면 노래 그리고 패션... 그런 노래가 흘러나오고 힙한 패션으로 저마다 무장한 곳을 우리는 핫플레이스라고 부른단 말씀! 


이태원의 몇 안 남은 그 시절 캐치프레이즈라 한다면 역시 재즈바가 있겠다. 레트로의 화신. 부기우기, 이태원 경리단길



 레트로란 무엇일까? Retro.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을 지닌 복고의 영단어이다. 흔히 레트로 문화 하면 20년즈음 전의 전반적인 유행이 다시 현재에 성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10년 전이 아닌 이유는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촌스럽게 느껴지는 탓이고, 20년 정도 지나자 위 세대에는 신선한 향수로,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문화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레트로 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만연하기도 하고, 심지어 작년에 온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온 거 마냥 끊임없이 부활하는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말하자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땐 좋았지’ 라는 감정이 항시 박혀 있기 때문이고,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어린 세대들은 그들의 문화 소비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이에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누적된 문화의 양이 남아있는 과거의 문화들을 끌고 왔던 것이 신선한 성공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경리단길로 필두되는 핫플레이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레트로가 얼마나 만연하게 문화 전반에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경리단길을 비롯한 대부분의 핫플레이스가 결국 힘을 잃고 마는 주된 원인은 높아지는 지가와 프랜차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이지만,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었다. 경리단길이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 감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잃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문화 소비 속도가 빠르지 않아 앞에서 언급했듯이 역사가 반복되는 주기를 20년 정도라고 잡았었다면, 지금은 1년 정도의 기간 내에서도 그 트렌드라 하는 것들이 심심하면 뒤바뀌어 문화 소비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 경리단길이 다시 주목을 조금씩 받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 있다. 빨라진 문화 소비 속도에 경리단길의 시대도 그만큼 빨리 돌아오려는 것.


이러한 레트로 문화는 핫플레이스의 디자인, 특히 인테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눈이 즐거운 가게 내부 인테리어와 구조는 우후죽순으로 들어오는 카페와 바와 레스토랑의 파도 속에서 군계일학이 되기 위한 최소조건이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등장하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라오고 주목을 받는 가게들의 디자인에 ‘인스타 감성’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각광을 받게 되자, 개성적인 소품과, 컨셉은 오히려 음식의 질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레트로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신촌 일대를 돌아다녀 보자. 레트로한 분위기의 술집(웬만하면 바(bar)일 것이다.)에 들어가 보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좁은 길목과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문과 벽일 것이다. 의자에 앉으면 식탁 구석에 닌자거북이 피규어 같은 게 한 뭉치 정도 세워져 있고, 저쪽 선반에는 LP판이 산을 이루고 있다. 푸르스름하거나 불그스름한 조명, 배경 음악으로는 옛날 노래. 네온 사인도 한 두 개 걸려있을 것이고, 사진처럼 오락실 기계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에도 스티커를 저리 붙이고 다녔을까?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과거에서 정확히 그 물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러한 분위기를 내기만 하면 된다는 형태의 문화를 따로 또 분리하여 뉴트로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레트로 문화가 이제는 젊은 세대들을 주 타겟층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성적인 소품과 인테리어 또한 그 가게의 성공요인이 되었다. 편집샵의 등장배경이기도 하다. 우주만물, 을지로.



레트로한 분위기의 조명과 오락실 기계. 채널1969, 연남동.



알다가도 모를 스티커들이 난무한 문. 제비다방, 상수동.


리모델링.

과거의 잔재를 남겨 새로운 것들로 나머지를 채워넣는 일... 어쩌면 리모델링도?


잘 보면 기존 건물의 일부를 남겨두고 리모델링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연희동.


신촌이나, 홍대 같은 중심축에서 살짝 빗겨 나가, 연남동, 연희동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보면 한 가지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새로 지어진 듯한 건물들이 알고 보면 신축인 경우가 많이 없다는 점이다. 잘 보면 기존 건물의 뼈대와 같은 부분을 남겨두고 나머지만을 리모델링하여 특유의 분위기를 지니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들 원래 있던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지어가며 카페를 집어넣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가. 그러한 연유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확장되거나 하지 않고 본래 크기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반지하가 많았던 과거 특성과 겹쳐 반지하가 남아있는 건물이 많으며, 주 출입구가 1층에 있는 경우도 있고, 2층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리모델링 방식의 원조격인 형태는 을지로 일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촌 뒷골목, 을지로 구석구석을 걸어 다녀 보면 문 앞에서 까지만 해도 이 너머에 그런 카페가 있다고 싶을 정도로 허름한 건물이거나 겉모습일 때가 많다. 아예 건물 자체는 허름한 건물인데 호실 하나 정도의 내부 구조만 뜯어고친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이러한 리모델링 형태가 디자인적으로 더 발전하여 기존 건물을 다 부숴버리고 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남겨놓거나 거의 틀을 바꾸지 않고 디테일을 바꾸는 정도로 과거의 향수나 특유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형태의 건축이 등장했다. 과거에는 비교적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이러한 리모델링이 이뤄졌다면, 현재는 이러한 형태의 건축이 나름대로의 미적 영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렇다. 건축에도 어떻게 보면 넓은 의미의 '레트로 열풍'이 돌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성수동은, 사실 현재에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공업단지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공업지역이었다. 저쪽에는 수제화 거리가, 이쪽은 자동차 공업사, 저기는 금속공장들. 이미 기능이 정해진 지역이고, 심지어 그 구조가 불안정하지도 않아서 우리가 흔히 아는 핫플레이스의 탄생 배경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비슷한 기능의 을지로처럼 유난한 지역이지도 않아서 더더욱 현재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성수에서 뚝섬까지 이르는 이 일대가 핫플레이스가 될 수 있었던 방아쇠는 대림창고의 등장이었다. 대림창고는 1970년대에는 정미소로, 1990년부터는 공장 부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그 후 이 낡은 창고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전시회나 공연이 열렸고, 이는 일종의 핫플레이스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갤러리 ‘컬럼CO:LUMN’이 들어오면서 기존 창고의 형태를 보존한 채 리모델링을 하여 한쪽에는 정원이, 그리고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건축가 홍동희는 이 창고가 근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충분한 건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바로 옆 땅까지 들어선 고층 빌딩을 보며 시간이 지나면 이 건물도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위기감이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결과적으로 건물의 과거를 남기려던 건축가의 선택은 보존을 통해서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성수동에는 배산, 성수연방과 같이 비슷한 방법으로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본래 가지고 있었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건물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레트로 건축의 결정판을 성수동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 창고의 형태가 보존된 모습. 대림창고, 성수동.



기존 건물의 지붕을 들어내고 유리로 새로운 공간을 만든 ‘천상가옥’. 왼쪽은 개조된 새 공간, 오른쪽 벽은 기존 건물의 일부. 성수연방, 성수동


레트로. 핫플레이스. 건축. Old에 그 근본이 있으면서도 한없이 New한 것들.


후암동.

후암주방 등 용산구에서 꾸준히 진행 중인 골목길 상생 프로젝트들의 성공도 어떻게보면 레트로 문화의 덕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아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는 베통 브뤼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후암동.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리나라 건축의 최근 트렌드는 사회 전반적으로 꾸준히 만연해 왔던 과거 회귀 본능, 레트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과거의 문화를 과거의 것으로 남기고 보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끌어오거나 지우지 않고 계속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건축에서도 드디어 이러한 경향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지저분하다고. 돈이 없어서 그러나 왜 보기 숭한 벽을 냅두고 그러냐고. 뭐, 일리는 있다. 모든 건물이 대리석 바닥과 말끔한 벽이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베통 브뤼(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의 등장도 바로 그러한 기존의 인식을 부수면서 시작했다. 거친 콘크리트의 표면이 재료와 나아가서 전반적인 건물에 생동감을 부여했다면, 레트로 건축의 과거의 파사드가 현재에 파사드와 이어진 그 모습도 또한 그 이질적임에서 나오는 역동성과 시간적 생동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단순히 핫플레이스의 인테리어를 넘어서 더 나아가 최근 건축의 트렌드를 찾아보면서 한국인의 과거 회귀 본능, 레트로 문화와의 연관성을 짚어보았다. 레트로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끌어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들과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된다는 것에 있다. 레트로 문화를 단순히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함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과거의 벽돌담과 현재의 커튼월이 연결되어서 생성되는 새로운 느낌의 공간. 그것이 현재 레트로 건축만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아는동네 아는연남(2017). 어반플레이.

아는동네 아는성수(2019). 어반플레이.

대림창고의 의미있는 변화 예술이 깃든 창고, 갤러리 컬럼. 럭셔리(http://luxury.designhouse.co.kr).


도판출처

개인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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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잡담러 L | K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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