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제주도 애월 여행(5) / 중요한 건 나를 더 믿어주는 것
여행을 가면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을 찾아간다.
애월에도 책방이 몇 개 있었다. 그중에 가까운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골목에 있는 책방이었는데 길을 못 찾고 지나쳐서 좀 더 가버렸다. 뒤로 끙차끙차 다시 신나게 라이딩.
옆으로 보이는 바다색은 어디서 많이 본 색이다 싶었는데 리스테린 색이었다.
@애월책방 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공간. 옛날에 제주 한달살이 하며 자주 갔던 소심한 책방의 초창기 모습과도 조금 닮아있어서 너무 좋았다. 책 내용을 필사해 놓은 거랑 책마다 코멘트가 달려 있는 것은 월정리에 있는 책다방도 떠올리게 했다.
들어가자마자 책을 가지고 왔냐고 물어보시길래
"네, 가방 안에요!"라고 했더니 놀라시던 사장님.
알고 보니 책이 아니라 차 가져온 거냐고 물으신 거였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도 아니고 차를 집어삼킨 가방이라니..
규모가 작은 책방인데 나밖에 없어서 혼자 토마토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수줍은 사람에게 평일의 여행이란 참으로 부끄럽구나. 누구 한 명이라도 더 들어오길 바라며 책을 구경했다.
'선택지가 단순해질수록 생각도 단순해진다.'
사장님이 적어둔 문구에 혹해서 집어든 책.
너무 n스럽지도 않고(내 기준 n스럽다는 것은 어려운 비유와 은유가 엄청 많은 것을 의미, 근거는 없음) 어느 정도 나랑 비슷한 점도 있어서 끌렸다.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지나기도 했고, 공간이 협소해서 안 사고 나가기 민망한 마음도 살짝 있었다. 제주 여행의 기록을 한 권의 책과 함께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므로 구매를 결정했다.
그 사이에 들어온 손님이 내 앞에서 책을 계산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막 책갈피를 골라보라면서 거기에 적힌 말을 읽어주고 있었다. '행복은 찾으려 하지 않아야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듣는 내가 더 민망스러운 신기한 곳이었다.
나도 이따가 책갈피를 골라야 할 텐데 대체 어떤 표정과 반응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책을 안 사고 도망가야 하나 싶던 순간에 내 차례가 왔다.
사장님이 내가 들고 온 책을 보더니 추가 설명을 해주셨다.
"이 책의 저자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하나도 몰랐대요. 한국에선 뭐 하나 제대로 끝을 내본 적이 없대요. 29살에 남자친구랑 세계여행을 떠났는데 해외에 가서야 잘하는 걸 깨달았대요. 그래서 이 책을 쓰고 그림도 직접 그렸대요. 나가보니까 자신이 이걸 잘하는 거야."
그리고 책갈피 하나를 뽑아 보라고 하셨다. 아이스크림 막대처럼 생긴 책갈피였다.
'자신을 좀 더 믿어보세요'
저 말을 사장님의 입으로 듣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학원을 무작정 휴학하고 뭘 해야 할지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 상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훌쩍 떠나온 것이었는데 사실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였다. 무기력이 반복되다 보면 무력함을 낳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그 어떤 것도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어차피 안 될거야. 넌 못해. 늘 그랬잖아.
신기하고도 이상한 컨셉의 사장님, 아니 서점이지만 그 와중에 눈물주머니가 조여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또 위로가 되는 걸까. 책과 책갈피를 소중히 끌어안고 나왔다. 쏟아지려는 눈물과 펑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조용히 지켜봐 주기 위해 동네를 찬찬히 걸었다. 눈물샘은 이미 차오른 눈물을 버거워했고, 가슴은 조여왔다. 결국 나는 가뿐 호흡과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사장님의 입을 빌려서 그런 말을 한 건가? 우는 내내 아프고 서러웠다. 나를 못 믿어서, 계속 못 믿어줘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도대체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며 가지 자르듯 쳐내기만 했다. 지지를 받지 못했던 내 안의 나는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그 아이는 결국 무기력해졌겠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길 봐달라고 믿어달라고 말하는 듯했다.이 책을 안 골랐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입을 통해 가슴 깊은 곳까지 위로를 받았다. 나조차도 방치했던 그곳을 말이다.
펑펑 울고나서 이번엔 자전거 대신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버스는 해안도로를 쌩쌩 달렸다. 옆 창으로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파랗고 아름다웠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이 후련했다. 뭔가 사라진 것처럼, 마치 날아갈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