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까다롭고 예민한
누군가 나에게 무인도에 가져갈 3가지 물품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로 0.3mm 샤프를 고를 것이다.
샤프를 무인도에?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만큼 샤프는 내게 특별하다.
그것도 그냥 샤프가 아닌 정확히 0.3mm 샤프여야 한다.
내가 처음 0.3mm 샤프를 알게 된 건 중학교 때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가 자기가 쓰던 샤프를 빌려주었다.
새빨간 다홍색의 펜텔 제도 샤프 0.3mm, 수류탄처럼 생긴 고무 그립이 달려 있었다.
그전까지 0.5mm 샤프만 써왔던 나에게 날렵한 필기감을 자랑하는 펜텔 제도 샤프는 신세계였다. 부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종이 위를 스치는 그 느낌은 뭐랄까, 짜릿했다. 그때부터 나는 세필의 세계에 입문했다.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얇은 샤프를 쓴다는 건 어쩐지 자부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건 참 쉽지 않다. 0.5mm 샤프의 투박한 안정감과는 달리 0.3mm 샤프는 훨씬 더 예민하다. 조금만 힘이 과하게 들어가도 뚝-뚝- 심이 쉽게 부러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을 다 빼버리고 쓰면 가늘고 맥없는 글씨가 나온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처럼 조심스럽게 힘의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샤프심을 너무 많이 꺼내면 위태롭고, 적게 꺼내면 금세 닳아버려 답답하다. 게다가 0.3mm 샤프심을 파는 곳도 흔치 않아서 재고가 있는 문구점을 기억해 뒀다가 한 번에 여러 개씩 쟁여두곤 했다.
그럼에도 이 샤프를 계속해서 쓰고 싶었다. 예민해서 더 끌렸고, 날카롭고 뾰족해서 더 정이 갔다.
세필에 눈을 뜨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0.3mm의 절제된 굵기.
거친 종이를 가르는 샤프심을 느낄 때 쾌감이 느껴진다.
날렵한 심이 새침하게 종이 위로 미끄러질 때면 마치 종이 위에서 스키를 타는 기분이 든다.
그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온 신경이 손끝으로 향한다.
거의 20년을 써왔는데도 여전히 조금만 방심하면 심이 '툭' 부러진다.
참 쉽지 않은 녀석이다. 그럼에도 어느덧 이 샤프가 아니면 글씨를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수능 볼 때만 빼고는 늘 나와 함께였다.(수능 샤프가 0.5라서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남과 다르고 싶어서 입문했지만 어느덧 이 샤프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인도에 가져갈 만큼 내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조심스럽고 잘 다뤄줘야 하고, 섬세한 밀당이 필요한 이 얇은 샤프.
가만 보면 0.3mm 샤프는 나를 닮았다.
날카롭고 예민했던 나, 까다로운 완벽주의자.
손이 많이 가지만 그래서 더 애정이 간다.
나와 꼭 맞는 샤프를 만나서 좋은 것은 자꾸 종이에 뭔가를 쓰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이유 없이 끄적끄적 대는 일이 늘었고, 덕분에 나는 가방에 늘 노트와 샤프를 들고 다닌다.
언제든지 뭐라도 적을 수 있게.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필보다는 샤프, 샤프보다는 볼펜을 더 자주 쓰게 된다.
하긴, 샤프는 잘 번지고 샤프심도 넣어줘야 하고 볼펜에 비해 번거로운 단계들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은 까다롭고 예민한 그래서 예리한 0.3mm 샤프가 좋다.
나이가 들어서도 머리맡에 놓고 메모를 하거나, 일기를 쓸 땐 이 샤프를 손에 쥐고 있을 것 같다.
이렇게 0.3mm 샤프에 대한 조용한 집착과 짝사랑은 아마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