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오래도록 함께 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년필에 대한 로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어린 시절 아빠의 외투 주머니 속에서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던 만년필은 서류 위에 서명을 휘갈길 때만 본모습을 드러냈다. 아빠 몰래 몇 번 만지작거려본 적이 있지만 함부로 다루면 안될 것 같은 아우라에 금세 내려놓곤 했다. 내게 만년필이란 어른들의 물건이자 마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손에 쥘 수 있는 고급스러운 펜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크면 만년필을 쓰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만년필이 내 필통 속으로 들어오게 된 건 만년필 애호가인 친구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는 만년필로 쓴 편지를 건네며 만년필의 매력을 끊임없이 얘기했다. 넘쳐나는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 자리에 있던 나와 애인은 만년필을 당장 써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컨버터'니 '카트리지'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볼펜은 그냥 쓰면 되지만, 만년필은 잉크를 어떻게 넣을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대표적인 방법은 두 가지. 잉크병에서 직접 채우는 '컨버터'와, 딸깍 꽂아 쓰는 '카트리지'가 있다. 입문자라면 카트리지가 부담이 없다. 볼펜 리필심을 갈아끼우듯 쉽고 단순하다.
며칠 뒤, 베스트펜에 들러 여러 만년필을 시필해본 끝에 '프레라'를 골랐다.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모델답게 가볍고 쓰기에도 편하다. 각인 서비스로 이름까지 새기니 마치 어릴 적 꿈꾸던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명할 때 뿐만 아니라 필사할 때, 일기 쓸때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남들에게 만년필을 쓴다고 하면 '찐 문구인'처럼 보일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해지지만, 나는 아직 초보자다. 만년필용 종이가 아닌 아무런 종이에 글을 써서 번지기 일쑤고, 컨버터로 잉크를 채우는 일이 귀찮아서 시도조차 안해봤다. 번거로움에 지쳐 만년필을 멀리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지독한 실용주의자인 내가 언젠가 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고 싶어질 날이 오면 도전해볼지도 모르겠다.
만년필은 종이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어떤 종이에서는 만년필이 스케이트처럼 미끄러지고, 어떤 종이에서는 브레이크가 걸린다. 먹물처럼 번져서 서예 수업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종이도 있고 내가 몰랐던 글씨체를 꺼내주는 종이도 있다. 또박또박 단정한 글자를 쓰게 만드는 종이가 있는가 하면, 흘러가는 듯 자연스럽게 휘어지게 써지는 종이도 있다. 무엇이든간에 내 맘에 쏙 드는 종이를 만나면 계속해서 뭐라도 쓰고 싶어진다.
예쁘고 값비싼 만년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은 애써 고개를 돌린다.
나에게 중요한 건 더 많은 도구가 아니라 펜을 쥔 손, 그리고 종이 위를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손에 익은 만년필 한 자루와 호흡을 맞춰가며, 한 줄 한 줄 천천히 오래도록 써내려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