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기록
문구의 가치는 자주 저평가되곤 하지만 사소하고 작은 문방구일지라도 그것이 가져다줄지 모를 효과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김규림 <아무튼, 문구>
우리는 늘 문구와 함께 살아간다. 책상 위에 볼펜 하나, 노트 한 권조차 없는 사람은 없다. 매일같이 사용하지만 너무 당연하기에 문구가 가진 힘을 종종 잊곤 한다.
나에게 노트는 사춘기 시절, 일종의 피난처였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 꺼내지 못하는 말을 노트에는 쏟아낼 수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와 나눈 대화, 누군가를 열렬히 짝사랑했던 흔적, 따돌림을 당한 날의 기억까지도 노트에는 큰따옴표와 함께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노트에 적는 습관은 계속해서 이어져 어느덧 이력서에 ‘일기쓰기‘를 취미란에 적을지, 특기란에 적을지 고민할 나이가 되었다.
요즘처럼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억지로라도 이어가면 좋은 습관이 있다면 '일기 쓰기'가 아닐까. SNS 속 넘쳐나는 타인의 말만 받아들이다 보면 내 생각이 뿌리 내릴 틈이 사라진다. 그럴 때 노트를 붙잡고 버티다 보면 나도 몰랐던 마음 깊은 곳에 닿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결국 그 과정에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사유를 방해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트 속으로 자주 다이빙하고 싶다. 네모난 종이 위에서 샤프와 만년필로 미끄러져 가며 유영하고 싶다. 자유롭게 여백을 헤엄치고 나면 조금은 더 나다워졌다고 느낀다. 현실에 찌들어 날서있던 내 모습이 노트 위에선 잠시나마 녹아내리고 온기를 되찾는다.
물론 노트를 펼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가 있다. 힘들고 지칠수록 책상 앞에 앉기까지가 오래 걸린다. 나를 마주한다는 것은 때론 가장 두려운 일이 되기도 하며, 소란스러운 세상에 시선을 뺏기다 보면 펜을 드는 일이 후순위로 밀리고 만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그저 적는 것뿐이다. 나를 찌르는 말들과, 감싸안는 말들의 반복 속에서 다시 '나'를 찾아간다.
노트는 비싸봤자 얼마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안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소소하게는 오늘 먹은 음식부터, 쉽게 꺼내기 어려운 고민들까지. 그래서 나는 어딜 가던 가방 속에 꼭 노트를 들고 다닌다. 시시콜콜 적다보면 하루에도 나만의 데이터가 수없이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망각 곡선 저 너머로 사라지기에 잘 적어둬야한다.
억지로라도 끄적이고 나면 ‘괜히 썼나’하는 후회는 남지 않는다. 문구와 함께 한 시간은 나를 결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김없이 털어내고 나면 한결 개운해진다. 그렇게 쌓인 노트들이 한 권, 두 권 모여 나를 지탱한다. 이게 바로 노트의 힘, 사소한 문구의 힘이 아닐까.
오늘도 내일도 쌓여가는 기록만큼 나는 천천히 더 단단해질 예정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계속해서 노트를 산다. 그리고 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