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병은 진행중
문구만 봐도 설렌다. 이건 진짜 병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문구는 내 소비욕구를 두드리고, 지갑은 자꾸만 열린다. '이건 이럴 때 쓰고, 저건 저럴 때 쓰면 되겠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문구를 들이지만, 결국 책상 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쌓여있는 문구가 많다.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습관과도 같다. 그저 그쪽을 향해서 걷게 된다.
나에게 그쪽은 언제나 문구였다. 좋아하니까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수입 문구를 들여오는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재고를 정리하고, 신제품을 살펴보며 감탄했다. 가격이 비싸 선뜻 사진 못하고, 사고 싶은 폰 케이스 하나를 몇 달 동안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곤 했다. 결국 마음먹고 사들고 오던 날은 얼마나 뿌듯하던지. 몸은 힘들었지만 문구는 나에게 묘한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나는 하얀 인테리어와 빛나는 문구들 사이에 틀어박힌 '빛바랜 알바생'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문구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엔 문구와 소품을 함께 다루는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온종일 문구에 둘러싸여 지낼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그곳은 온라인 중심의 회사였고 관심은 매출에 쏠려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문구보다는 돈이 되는 리빙/가구 MD가 주목받았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만들어낸 문구를 시장의 눈으로 보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점심시간에 매장에 내려가서 문구를 구경하는 시간이 그나마 즐거운 순간이었다.
퇴사 후 진로를 고민하면서도 끝끝내 문구를 놓지 못했다. 좋아하니까, 한 번쯤은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큰 돈과 마음을 들여 노트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워크숍에 참여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등생처럼 수업을 듣고 나서는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렇게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문구를 만들 때보다는 모아놓고 오래 들여다볼 때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문구를 많이 사지 않는다. 많이 가지면 애정을 고루 나눠줄 수가 없고, 그 사이에 무심해져 버리기도 한다. 가깝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둘 때 마음이 더 또렷해진다. 이렇게 절제하면서까지 문구를 대하는 건, 내겐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쉽게 놓고 싶지 않은 소중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문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기웃거린다.
문구를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고, 브랜드도 꾸려보고.
그러다가 문구가 싫어질까 두렵기도 하다.
좋아하는 걸 업으로 삼는다는 건, 설렘과 현실의 경계에 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