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에세이 <만원 버스에서 내려 걷는 중입니다>
부산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나락서점에서 <둘이 함께 살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커플 에세이를 만났고,
그걸 보면서 우리 커플도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락서점에서 <독립출판 클래스>가 열려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독립출판 클래스를 들은 건 2021년 8월, 그때부터 나와 애인은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2021년 8월 - 초고 쓰기
기획회의만 3-4번, 주제도 서너 번 엎었다가 다시 잡기를 반복.
겨우겨우 우리 커플의 '다름'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각자 2주간 하루에 2개씩 원고를 쓰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4일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일매일 글을 썼다. 이때 카페에 쓴 돈이 얼마더라ㅎㅎ
처음 며칠간은 글이 진짜 잘 써졌다. 그래서 불안했다. 계속 그럴 수 없단 걸 알기에.
그리고 며칠 후, 역시나 나는 글과 그 글을 쓰는 내가 싫어지는 슬럼프를 겪었다.
글이 잘 안 써져서 힘들다는 생각과 쓰고 난 글이 별로라는 생각이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두 손을 내려놓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노트북 위에서 손가락으로 디스코를 추며 기다려본다.
떠올라줘 제발
엔터와 백스페이스를 반복하는 삶.
쓰면서 사는 삶은 이런 삶이겠지. 한 발짝 나아가고 다시 퇴보하고,
그럼에도 또 나아가고 다시 퇴보하고.
- 초고 당시 쓴 일기
일단 내 글이 별로라는 생각이 자꾸 날 힘들게 한다.
써봤자 소용없다는 생각? 쓰레기라는 생각? 재능이 없다는 생각?
이 글을 만약에 어디에도 보여주지 않고 나만 간직할 거라면 내가 이렇게 괴로워할까?
이 글로 책을 만들 것이고, 누군가에게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 부담 속에서 나는 괴로워하는 것이다.
- 초고 당시 쓴 일기
2021년 9월 - 퇴고하기
그러고 나서 곧바로 두 번째 위기를 겪었다.
사실 고통의 크기로 치자면 이게 훨씬 크다.
그건 바로 퇴.고.의.늪
초고를 쓴 나에게 묻고 싶다. 이걸 글이라고 써놓고 다 썼다고 놀러 다닌 거니?
- 퇴고 당시 쓴 일기
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기가 두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별로여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다 지우고 다시 써야 할지 애초에 이 글이 말이 되는 글인지. 재미도 감동도 없는 글이라는 생각에 다 그만두고 싶었다.
솔직히 애인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것이다. 위기를 마주치면 그만두는 건 내 특기니까. 난 완벽주의에다가 회피형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흔적 없이 뒤안길로 사라진 프로젝트가 몇 갠지 모른다.
퇴고가 잘 안될 땐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독서는 나에게 약을 주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이렇게 써봐야겠다!'라는 순간이 온다. 뒤이어 '글을 진짜 맛깔나게 잘 쓰신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쓸 것 같은데. 나 따위가 책을 내도 될까?'하는 순간이 따라온다.
퇴고하기 힘들다고 애인한테 맨날 기분전환하러 놀러 가자고 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그렇다고 맘 편히 노는 것도 아님.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서 자꾸 한숨 나오고 너무 괴로웠음.
그 시간에 퇴고를 했어야지 인간아...
이 글을 처음 쓸 때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그때의 나를 만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1차 퇴고를 하고 나면 또 '미래의 나'가 보고 2차 퇴고를 해주겠지.
퇴고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가 만나는 작업인 셈이다.
왜 이렇게 썼냐며 머리채를 잡기도 하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며 다독이기도 하고, 다 포기하고 드러누워버릴 때도 있지만 결국은 또다시 책상에 앉게 된다.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려고.
여러 시제에 존재하는 '내'가 만나 머리 아픈 퇴고를 이어간다.
- 퇴고 당시 쓴 일기
2021년 11월 - 탈고
그렇게 질질 끌다가 11월 말에 드디어 퇴고를 마무리했다. 사실 마무리를 했다기보다는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맘에 안 들어서 글을 붙잡고 늘어져가며 퇴고했다.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기나긴 퇴고의 시간을 가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퇴고를 한 시간보다 자기혐오에 빠진 시간들이 더 길었다. 퇴고가 2할이라면 자기혐오에 빠져 지내던 나날은 8할쯤.
애인은 나와 달리 퇴고를 일찍 마치고 기다려줬다. 내가 나의 속도로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웠다.
2021년 12월 - 드디어 출간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책은 완성됐고 며칠 전에 최종 인쇄본을 받았다.
우리가 쓴 책 제목은 <만원 버스에서 내려 걷는 중입니다>
브런치북으로도 발간했었는데 거기에 글을 더 추가했다.
6년째 연애 중인 비혼, 비건, 비고용 커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에세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이 아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보는 시도의 집합이다.
6년 넘게 사귀었지만 애인이랑 같이 뭔가를 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많이 다투기도 했다. 우리의 성향은 정반대기 때문. 연인이 아닌 사업 파트너로서의 우리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상호보완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시도를 함께 해 볼 예정이다.
물론 책이 나왔다고 해서 자기혐오가 끝나는 건 아니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읽힐지가 너무 두렵다. 모두의 마음에 들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참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건 이 프로젝트가 끝나간다는 것이다. 끝을 보지 못할 것 같았던 내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사실이 후련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직접 독립출판을 해보면서 많은 걸 느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걸 꼽자면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을 비평/비난하지 않고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처음을, 숱한 자기혐오 끝에 나온 결과물을 감히 내가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창작물을 바라볼 때 결과만 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과정까지도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 누군가는 끝끝내 지쳐 포기해버렸을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처음은 굉장히 미흡하고 어딘가 이상하다.
지금 다시 한다면 무조건 그것보단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린 똑같이 부족한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그건 그냥 처음이라서 그런 거니까. 뭐든 처음은 그렇다.
부족함을 용기로 덮어내고 세상에 나온 모든 처음을 응원한다.
- 출간 완료 후 일기
그 와중에 최종본에서 오류 발견해서 또 자책하고 오류 문자 보내고 안내문 인쇄하고 붙이고 난리 파티..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다. 정신없는 나날들. 어쩌겠어 우리 잘못인데. 독립출판 이거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구매해 주신 분들이 모두 따스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ㅠㅠ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재사용 박스, 재사용 완충재를 열심히 구해다가 포장하는 중이다.
집이 거의 쓰레기장이 됐다.
이제 선주문해 주신 분들의 책을 순차적으로 발송하고, 독립서점에 열심히 입고시키는 것만 남았다.
그러면 진짜로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된다.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고생했다. 우리 커플.
마지막으로 요즘 푹 빠져 있는 김연수 소설가의 말을 덧붙이려 한다.
모든 창작자분들 우리 힘내요! :)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 소설가 김연수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