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단상
만일 누군가 자신의 SNS 계정에 산채로 잡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닭 사진을 올린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야만인 취급할 것이며 닭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 설령 그가 평소에는 산나물만 먹다가 1년에 딱 한 번만 그런 방식으로 직접 기른 닭을 잡아먹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닭이 아닌 소나 돼지여도 사람들의 반응은 마찬가지일 것이고, 개나 고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스운 사실은 SNS 피드에 고기 사진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혐오는커녕 맛있겠다며 어디 가게냐며 정보를 묻는 아이러니를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런 간극이 발생하는 것일까? 고기를 즐기는 자들이 고통 인지 감수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라면 동물을 직접 죽여서 먹는 것도 잔인하다고 여길 줄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채식을 하며 지내온 세월보다 고기 없인 밥을 먹지 않던 세월이 훨씬 길었던 사람으로서, 이는 구조적 문제, 그리고 그 구조를 더욱 견고히 하는 구성원들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철저히 분업화된 환원주의적 사회로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을 외면할 수 있도록 눈을 가려주고, 죄책감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겨주는 “편리한” 세상이다. 과거 수렵/채집인 때와는 달리 소위 현대인은 대부분 굶어 죽을 걱정이 없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결과, 과거와는 다르게 동물의 죽음을, 설령 잡아먹기 위한 죽임이더라도, 직면하면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과거에 동물은 사냥감으로 여겨져 즉각 조건 반사적으로 군침을 유발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소가 도축되며 피범벅이 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동물 = 먹을 것”이라는 연결 고리가 깨진 것이다. 대신에 그 자리를 “고기 = 먹을 것”이라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차지했다. 그것이 한때는 동물이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지, 가슴으로까지 그것이 동물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고기를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건 도축장이라는 피바다를 단 한 번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하고, (경험해 볼 필요도 없고) 일상에서 차단시킨 채 머릿속에 개념으로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직접 동물을 죽일 일이 없이 모든 육체적/정신적 ‘고역’을 도축업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고기 한 점에 담긴 동물들의 피와 눈물로부터 오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토록 “편리한 단절”로 이루어진 세상을 더욱 견고히 해주는 것은 이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채식 대안(EVA)의 창립자 토바이어스 리나르트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남들도 먹기 때문이라고 말한다(aka 군중심리). “편리한” 세상 아래에선 모두가 하는 행동에 대해선 잘못됐다는 의심조차 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의심이 되더라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튀는 소수”로 인지될까 봐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자신과 달리 용기를 내고 행동으로 옮긴 튀는 소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하는 행동과 생각을 돌아보기 만드는 불편함을 때로 느끼더라도 “그래도 고기는 먹어야 하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고기는 못 끊겠더라” 등의 말을 꺼내며 지원군을 찾게 된다. 다행히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자신의 의견이 격하게 동의해주는 동지들이 많기 때문에 이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튀는 소수가 틀렸고 자신이 역시 옳다는 기존의 믿음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머리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뜬장님으로 살아가면서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리한 거짓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이 주는 혜택은 참으로 달콤하다. 언제 어디에서나 고기를 맘 편히 먹을 수 있다는 편리함과 풍족함. 도축 부산물로는 사골 육수도 만들고, 하리보 젤리도 만들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서핑보드 대신 동물을 탈 수도 있고, 동물들을 가둬 놓고 ‘애들 교육을 위해’ 구경을 할 수도 있다. 이미 안전한 화장품이 많은데도 굳이 더 좋은 걸 만들겠다고 동물 실험을 할 수도 있다.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한 신약 개발도 동물 실험도 필수다. 그러다 돼지독감 같은 전염병에라도 걸리면 땅에 산 채로 파묻으면 그만이다. 잠깐, 이렇게 동물 없이는 못 사는 존재이면서 동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 걸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채식의 중요성을 알리는 셀럽분들, 대기업들의 연이은 채식 제품 출시 소식, 학교 급식이나 군인 장병들 식단에 도입된 채식선택권 소식, 한때 화제가 됐던 MBC 다큐<휴머니멀> 등의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 덕분에 채식, 동물, 환경 등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조금씩은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서서히 기존에 알던 것들이 옳지 않았음을 알아갈 것이라 믿는다. 군중심리는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남들이 다 채식을 하면 사람들은 그냥 채식을 하게 될 것이다. 기준이 바뀌면 대중들은 시류에 자동적으로 편승할 테니.
지금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알길 바란다.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며,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당장에 변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어딘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에서 더 나은 사회로의 도약의 가능성이 결정되는 것 아닐까. 나는 인류가 동물들, 나아가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더 나은 관계, 한 행성 위에서 살아가는 공동의 지구 입주민으로서 공생하는 더 현명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에 대한 답을 찾아낼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