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인도적 지원 물자를 실은 배는 동해시에서 출발했다
동해시를 출발해서 부산을 거쳐 남포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구호물자의 종류는 쌀, 비료, 시멘트 다양했다.
대북인도적 지원의 일환으로 시작한 대한 적십자사의 대북지원 물자 전달은 다양한 회차로 진행 중이었다.
사내에 발송된 공문에 대북지원 단장을 모집한다는 문서가 들어왔다. 관계부서에서는 지원자를 모집했고 나는 선발의 기대와 관계없이 지원서를 냈다.
대북인도지원 남측 단장은 대외적인 타이틀 속에 적십자사에서 선발하고 정부 관계부처에서 교육이 진행됐다
물자 인도팀의 팀원은 단장을 포함한 4명으로 구성됐다.
이전회차는 비료를 지원하는 팀으로, 우리 팀은 시멘트를 지원하는 팀으로 움직였다. 시멘트는 강원도에서 생산하는 물자였고 태백산맥을 넘어 북으로 전달하면 일처리가 간단했지만 북측 이동수단의 문제로 우리는
시멘트를 남포에서 하역해야만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멘트를 지원하는 팀은 북측의 수해지원으로 지원하고 있던 물자가 남북관계가 불편해지면서 지원을 중단했던 지원물자로 그중에서 반가움( ? )이 덜한 물자였다.
동해에서 출발한 화물선은 부산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올라갔다. 인천을 지나고 태극기와 적십자 깃발이 걸렸다. 남포에 도착한 화물선을 북한의 도선사가 탑승해서 부두에 접안을 시작했다.
북한의 도선사는 1년에 2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그들의 설명) 엘리트 계급이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도선사는 말수가 적었고 태도는 신중했다.
북측의 세관직원과 북한 군인이 배에 올라 내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중 계급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책임자와 인사를 하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대화를 시작했다.
간단한 인사와 올라오는 도중에 불편함은 없었는지에 대한 안부인사 정도였지만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는 전쟁의 휴전당사자였다. 긴장할 수도 없었고 긴장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남측의 민간인이 북측의 군인과 마주 보고 서있는 상황은 예상할 수 없는 긴장감을 더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검역과 세관의 조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배에서 하선했다.
적십자깃발을 달고 벤츠 2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머물게 된 남포 구락부에서 남북의 적십자사 직원들은 준비한 서류에 서명하고 남포에서 머무는 동안에 주의사항을 안내받았다.
1. 핸드폰과 카메라는 사용할 수 없다(보관했다가 돌려줌)
2. 하역하는 물품을 증거로 남기는 사진은 허용한다
3. 증거사진 중에 북측의 민간인을 사진에 남기지 않는다
4. 북측의 민간인과 대화는 금지한다
5. 남포 구락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6. 수돗물은 사용하지 말고 양치도 하지 않는다
이전 회차의 적십자사 직원들이 남포에서 머무는 동안 배탈로 고생한 후에 우리는 식수를 직접 들고 북에 머물게 된다.(추측하기로는 대동강물을 정수해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포 구락부에는 외국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준비되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대학 운동선수처럼 평균키가 180 정도인 건장한 청년 들이었다. 표정은 밝았으며 친절했다.
우리는 일주일의 일정으로 해상에서 3일, 남포 구락부에서 4일 동안 최종 하역을 기다리며 지냈다.
남포구락부에는 체류하는 외국인을 위한 상점이 있었는데 수공예품과 북한에서 생산하는 맥주와 40도 정도의 술이 전시되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북한의 실정이나 남한의 정치적 상황을 주제로 한 대화는 자제하고 도청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서 말을 줄였다. 북측은 전력 사정이 좋지 못해서 자주 정전이 있음을 고지했고 양초를 비치해 놓았다.
북한은 족구를 즐겨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한국에서 올라온 우리 측 사람들이 남북의 족구 시합을 신청해서 숙련된 족구선수로 발전해 있었다. 우리도 식당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 족구 시합을 하며 지냈다.
배구코트의 네트를 내려서 족구시합장으로 만들고 경기에 패한쪽의 적십자사 단장이 맥주 내기를 했다. 남북의 시합은 전투에 가까운 국가 대항전을 방불케 했다. 게임은 격렬하게 진행됐고, 자존심의 대결도 한 몫했다.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부상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측 인원의 부상자가 발생하면 난감한 일이었다.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부상 없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남북의 자존심은 부상정도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배구코트는 초등학교의 반반한 맨땅으로 변한 지 오래돼 보였으니 나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연합팀으로 족구경기를 제안하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치열했던 자존심의 대결은 남북 혼성팀을 남북이산가족 상봉처럼 만들었고 이전의 전투에서 상대방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경쟁심을 같은 색으로 만들었다.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하는 북쪽의 민간인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시선도 주지 않았고 고난의 행군 때에 태어난 북한 군인의 키는 고등학교 1학년 정도였다. 하지만 경계심은 여느 북한 군인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행렬에 맞춰 지나가는 여군들도 북쪽의 관계자가 없을 때는 여느 소녀들과 다르지 않았으며 미소 띤 수줍은 얼굴로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난 구락부의 종업원과 식당의 청년들은 자주 오르내리는 우리들을 이쪽저쪽으로 나누지 않고 마주 했고 우리는 모든 일에 신중했지만 지나치게 민감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행동이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것은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었다.
에필로그
우리는 일주일 정도 북한에서 우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국 정부와 적십자사의 노력이 지금의 남북관계 속에서는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어도, 우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고 적의가 가득한 휴전 당사자로 마주 보고 서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적십자사 만이 할 수 있는 현장 속에 있었으며 그보다 더한 어려움 속에도 적십자인의 태도를 온전하게 바로 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다.
이제는 정치적 성향과 남북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적잖게 불편해하는 시선을 마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관점이 다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니 오래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도 우리는 남북의 화해무드를 경험했었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하기만 했던 우리의 관계를 이전으로 돌려보려는 노력에 마음을 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북한을 북측이라고 했고 그들은 우리를 남측이라고 했으니 북한과 남한의 명칭이 서로 혼용되는 경우도 어색하지 않았으면 싶다. 오래된 기억을 조심스럽게 활자화하는 것이 오타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면서 나는 한 가지 꼭 하고 싶었던 행동을 못하고 내려온 것을 후회했다. 남포를 안고 있는 대동강의 조약돌을 가져와 남포가 고향이신 실향민께 전해드리고 싶었다.
그 작은 돌멩이가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대하며 준비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하고 싶었어도 다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이 그것만 후회로 남았을까.
추신:오랜기억의 편린처럼 조각나있거나 사실과 다른것이 있다면 양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