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시간을 지나
계절을 정확하게 추정하고 지구의 공전주기와 일치하도록 태양력을 유지하는 윤년의 시간에는 이월의 날이 하루 늘어난다. 인간의 시간을 하루 늘려 계산하면서 귀신의 셈법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윤년에는 특별한 행위에 대하여 다른 존재의 위해를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파묘는 묘를 이장해서 묘지의 형태를 변경하거나 묘를 더 이상 관리 할 수 없어서 묘지를 정리하는 경우에 하는 행위였다.
같은 성씨로 사촌지간이 모여 살던 마을은 고조부모 때부터 기일이 같은 경우가 많았으며, 남남처럼 멀리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묘지의 위치가 사촌의 땅이나 형제의 땅에 위치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형제나 사촌지간에 흔한 관례였지만 한 세기 후에는 팔촌의 이름조차 낯선 이웃이 되는 자연스러운 세태에서는 난감한 일의 시발점이 되곤 했다.
타인의 땅에 오래된 묘지를 토지의 주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묘 기자권의 권리를 주장하는 송사는 흔한 집안 다툼으로 일대의 타성받이에게도 안주거리가 되곤 했다. 육촌 당숙은 본인의 땅에서 본인의 삼당숙묘의 이장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을 계속해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은 변했고 점점 그 간격을 벌리고 있었으며 강한 거부나 이장을 권고하는 행위는 당사자에게 부당한 언행일 뿐 입에 담을 수 없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다음세대까지 분쟁거리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안색은 밝지 못했다.
윤달에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고 파묘하여 수습한 인골을 화장하고 새로운 유택에 모시는 절차는 대동소이했다. 전국의 화장장이 절차에 따라 그곳으로 쏠리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은 시작됐다.
이장을 하기로 정한 날자에 수습한 인골을 화장하지 못하면 이미 파묘하여 수습한 인골과 모든 절차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달에 움직이는 이들은 우리와 같이 움직일 것이며, 화장장 예약은 모두에게 극강의 노력을 요구했으며 독특한 아이디어가 난무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하루 전에 피시방에 모여 다음날 영시에 수도권에서 먼 곳에 위치한 화장장을 예약하기 위하여 화장장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대기했다.
이장업체와 계약날에 맞춰 화장장의 예약을 성공하지 못하면 모든 계획은 다음 윤년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조상의 유택을 옮겨드리려는 전국에 있는 후손들의 피나는 노력은 가상할 정도였으며 오 분 만에 모든 숭고한 노력은 마감 됐다.
윤년을 기다려 유를 숭상하고 예를 다해 조상을 모시는 후손들의 노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귀신을 속이고 곡할 노릇이었다.
새벽 5시에 고조부님의 묘에서부터 파묘가 시작됐다.
파묘의 순서는 새벽을 깨운 주변의 산신과 묘지의 주인께 새로운 유택으로 모시게 됨을 고하고 번잡한 과정의 소란스러움에 송구함을 알리면서 시작됐다.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 곡진했다.
봉분을 허물고 평지가 되면 처음 모신 유택의 위치를 확인하는 흔적을 찾는다.
다음세대의 후손들이 유택의 봉분과 묘지석을 새로이 할 경우를 대비하고, 바른 위치를 찾기 위하여 유택의 주인이 잠들어계신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석물 없이 봉분을 보강하는 묘지는 대략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석물을 이용하여 봉분을 간소화하거나, 작은 규모로 봉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유택의 주인이 잠들어계신 위치를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석물을 설치하는 경우 석물이 유택의 주인을 가로지르는 불효를 저지르게 된다. 확인하는 방법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숯이었다.
유택의 출입문을 알리는 검정숯이 직사각형의 모서리에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계시는 구나 싶었다. 유택의 문을 지나 내실의 문까지는 2미터는 더 내려갔고 백 년의 세월 끝에 고손이 고조부님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세밑의 추위가 온전하게 솜이불속으로 전해지던 그해 겨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주할 순서였다. 열셋의 아들과 어머니는 마지막 작별을 어떻게 하셨을까? 봉분이 내려앉고 유택의 내실까지 문이 열리는 순간에 당숙의 말씀이 이어졌다.
" 어머니를 뵙지 말거라 잔상이 남는다"
사십 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어린 자식이 돌아가실 때의 시간보다 더 많은 세월을 보내고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고운 수의의 옷고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외조부의 기일이 한 겨울 속에 있어 한번쯤 불효자가 되셨으면, 그곳으로 향하는 차편이 끊겨 움직일 수 없으셨다면, 우리가 이렇게 외면하고 마주 서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삼 남매의 인생이 뒤틀리는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머니의 외출은 어머니에게도 남은 모두에게도 가혹한 시련과 탓할 수 없는 엄혹한 고통으로 남았다. 그해 겨울 짧은 이별 후 사십 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제부터는 피시방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시간이었다. 윤달의 시간을 공유하는 이들과 같은 생각을 피해 지방의 화장장으로 출발했다. 새벽의 산신을 깨우고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려면 오후 이른 시간에는 외출에서 돌아오셔야 했다. 외출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새로운 유택의 단장과 문패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새로운 유택은 자연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아래쪽은 개문하여 준비했고 평지에 모시기로 했다. 문패는 그 위에 혼란스럽지 않게 준비했다. 모든 준비가 댕기머리를 꼬아 단장하듯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오차 없는 진행은 산신의 보살핌과 윤년의 시간 속에 너그러움을 가진 존재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 끝에 댕기를 묶을 차례였다.
외출에서 돌아오실 때는 사각형의 작은 목관으로 돌아오셨다. 새로운 유택에 모시기 전에 인간의 소란스러움에 대한 죄스러운 송구함을 다시 고했다. 모든 것은 인간의 기준에 의한 행위에서 시작했고 그 행위를 우리의 기준에 따라 정당화했다. 윤년과 귀신의 셈법도 우리는 정당화했다.
작은 목관을 열어 새로운 유택에 어머니를 안아 모셨다. 어머니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해 겨울 마지막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던 눈길 속에 남아있는,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사십 년 그리움의 온기였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에게 허락한 너그러움의 시간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