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딸, 딸의 아빠.
# 1.
혼주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우리는 마주 보고 파이팅이라고 손짓했다. 딸과 나는 서로 쿨한 모습으로 결혼식을 마치고 싶어 했으며 아빠의 성혼선언문으로 주례사를 대신하지 말자고 했다.
신부입장 전에도 전의를 불태우는 전사처럼 서로 마주 보고 파이팅을 외치고 입장했다. 주례사를 듣는 동안에도 딸은 내내 웃는 표정으로 나는 식장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눈길이 고정되지 못하고 마음만 분주했다.
코로나로 온 나라는 불안하고 어색한 경험에 경황없이 노출돼 있었으며 경험치가 전무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평이한 일상 속에서 인생의 새로운 경험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모두에게 작은 소망일 뿐 대단할 것 없는 희망이었다.
우리의 파이팅이 혼례를 준비했던 나에게나 딸에게도 특별한 의미 라고 할 수 없었지만 우리의 바람은 그보다 작은 의미임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우리의 마음에 생채기 없이 원하는 색으로 물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색한 혼주화장과 불편한 다리에 맞는 신발과 정장은 면접장의 대기자와 같았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눈물 빼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 듣었지만 그런 일 없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지 말자고 우리는 다짐을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손수건은 안주머니에 넣어 갔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제식훈련처럼 결혼식을 마치고 왔으며 서로의 감정이 물을 가득 담은 풍선처럼 미세한 울림에도 긴 파장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애써 진정하며 참으려 했던 부녀 지간의 솔직한 감정표현을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손짓이 그 장소에서 손가락 약속보다 우리를 강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못한 느낌은 분명했다.
오늘 딸은 꾹꾹 눌러 참았을 것이다. 아빠 파이팅.
#2.
허리디스크 때문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을 때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실로 향하는 딸을 보면서 손을 들어 파이팅이라고 손짓했다. 우리의 두 번째 파이팅이었다.
허리의 통증으로 고등학교 때에는 교실 뒤에 서서 수업을 했으며 대학생활은 나의 직장 때문에 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또 한 번 나의 안일함은 단호한 결정의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손짓은 낯선 환경과 낯선 곳에서 우리만 아는 손짓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했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시선이 머문 곳을 바라보며 우리의 파이팅이 오늘도 잘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수술 전에 담당의사는 허리디스크의 탈출정도가 심해서 정상적인 수술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을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수술 전 준비시간도 시작을 알리는 수술 중의 붉은 표시도 길어지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다른 환자보다 화면의 순서는 계속해서 뒤로 밀렸고 대기순서에 딸의 이름만 남았다.
조금 빨리 결정하고 단호했어야 하는데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단호한 결정은 자신에게 혹은 자신과 관련된 무엇에게 붙이는 수식어 일뿐 어느 때에도 내 딸에게 붙이는 수식어가 될 수 없었다.
지지한 물리치료는 오래도록 늦추기만 하고 보잘것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의 힘을 빼고 단호한 결정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과감한 결정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퇴직 후에 나의 노고가 딸에게는 희망으로 가 닿기를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단호하고 과감한 결정은 출가외인의 가족에게 들어야 하는 말이 되었다.
수술의 결정권은 출가외인의 거리만큼 멀리 있었고 나의 단호한 결정을 더욱 무기력하게 했으며 사위의 결정이 먼저였다. 모니터에는 아직도 준비 중이라고 보이는 것을 나는 파이팅이라고 덧대어 보고 있었다. 예정했던 수술시간은 치료시기를 빨리 결정하지 못한 잘못으로 고통스럽게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파이팅을 속으로 외치고 있을까?
"여보 딸 가진 부모는 끝까지 딸 가진 부모인가 봐" 수술실 앞에서 기도하는 아내를 바라보고 한 말이었다.
아내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내도 파이팅이었을까?
오늘은 내가 단호하지 못한 선택 앞에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딸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