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서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 나이가 들면 추위를 많이 타나 봐"했을 때 함께 외출하는 아내의 옷차림은 계절과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겨울과 봄의 경계쯤에 나는 항상 겨울 쪽에 가까웠다.
계절에 대한 나의 태도를 변명하자면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했으며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변화를 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변화에 기대감이 적고 애써 외면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똑똑하지 못했고 그래서 현명하려고 했다.
계산하고 답을 구하지 못해서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의 질문에 답하려고 애썼다.
더해서 나누기 보다 더하면이 편했다. 더해서 빼는 것보다 그전에 둘로 나누기를 선호했다.
가던 길에 익숙하면 늘 오가는 길로 만들고, 돌아가는 길이 편하면 새로운 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편안해서 그 길만 고집한 것도 있지만 똑똑하지 못해서 길을 눈에 담지 못했다.
우리 부부의 태도에 대한 경계선을 보면 아내는 길눈이 밝았다. 내게 편한 길을 돌아서 새로운 길을 안내했고 그 길 끝을 궁금해했다.
바둑판 모양의 길을 돌아가도 길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지만 나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중국집이 있어야 했고 아내는 모퉁이에만 중국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를 하면 모퉁이의 중국집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안달을 했고,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고집은 살고 있는 집의 환경을 변화시켜주지 못했다.
똑똑하지 못해 현명하려고 했던 것은 현명하지 못해서 똑똑하지 못한 결과와 다르지 않았다. 경계선에서 똑똑하지 못한 인간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려는 의도는 시간이 갈수록 경계선의 구분과
태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방향을 잃어갔다.
경주마의 블링커( 레이스중에 다른 말들이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곁눈질을 해 경주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경우에 사용하는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30년을 근무한 회사에서 책임자의 보직을 원하지도 않았고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신규 책임자에게는 자신의 거주지를 벗어나 지방근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방근무를 마치고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올 때면 아이들의 사춘기에 아빠는 없었으며 대화 스킬은 회복불가능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주변의 동료들은 과감했고 나는 고집스럽고 완고 했는데 아내의 태도는 과감한 쪽에 가까웠다. 나는 충분히 현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고 흐렸다.
나는 지나간 세월을 끄집어내서 나를 공개적으로 상품화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공개적으로 뒤집어 놓아도 나는 3인칭의 시각으로 나를 보고 싶었다. 우리라고 표현된 태도가 조금은 순해 보일까 싶어서였다.
나의 삶이 모두에게 공감의 범주안에 있다고 해도 뒤집어 꺼내놓은 삶에 각주를 달아 필요이상으로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각자의 인생이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삶의 고통은 손톱밑 아픔처럼 제 것이 가장 클 것이며 내 인생의 눈물 나는 슬픈 내색을 스스로 소리치는 격이라 불편했다.
인생의 수많은 경제선에서 나의 완고했던 태도는 꺼내놓지도 못하고 스스로 변명하는 태도만 고집하고 있으니 나는 아직도 조야스럽고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