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국어 교사
십 대,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남들 앞에 나서서 말을 한다는 것만 생각해도 속이 울렁였다. 엄마는 내가 남들 앞에 나서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그리도 명랑했던 유년 시절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타고남도 있겠지만 나는 후천적인 환경도 의심해 본다. 나의 부모님을 살펴보자. 엄마 정숙 씨는 사람들이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 서면 식은땀이 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교를 입학하며 동화 작가로 등단한 엄마는 가끔 사람들 앞에서 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작가는 왠지 말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아빠 정환 씨는 경상도 사내였다.
-나 왔어. 애들은? 밥 묵자.
세 마디로 끝. 묵묵히 신문을 읽으며 늦은 저녁밥을 드실 뿐, 아빠는 필요 이상의 말을 잘하지 않는 분이셨다. 하긴 6남매 있는 대가족의 막내였던 아빠는 말 많고 드센 형들 사이에서 자기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한다.
-아이고, 네 아빠는 참 말이 없었재.
고향 친척 집을 방문하면 이렇게 아빠의 유년을 회상하시는 어르신을 여럿 만났었다. 오히려 나이가 드시고는 호르몬의 변화인지, 시국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건지, 밥상에서도 아빠의 말이 끊이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아빠는 과묵했다. 하여튼 내 핏줄에 남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고 말하기를 즐기는 유전자는 없다는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이다.
지금처럼 학생들이 발표가 일상화된 교실이라면 나의 말하기 울렁증도 없었을까. 내 학창 시절인 90년대만 해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물론 친한 친구들과는 이야기를 곧잘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힘들었다. 내 이름이 불리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름 모범생 이미지였지만, 학창 시절 회장을 한 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편안하게 오래 했던 역할은 학급 서기였다. 조용히 학급 일을 기록하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 않아도 되는 역할. 난 학급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록하는 서기 역할을 좋아했다. 낯선 이와 대화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시키는 것도 포스트잇에 미리 주문할 햄버거를 적어가서 직원에게 내밀 정도였다.
그런 내가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수많은 발표 앞에서 무너졌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권했다는 이유로 사범대에 왔지만 말하길 좋아하지 않는 내가 교사를 정말 할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세상에 말하기를 싫어하는 교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선배들, 동기들을 보면 다들 말을 잘했고, 최소한 긴장되어 보이진 않았다. 저들은 어찌 저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대학교의 수많은 조별 발표를 준비하며, 또 나이를 먹어가며 익숙해져 나의 말하기 울렁증도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어려운 대상이었다.
진로 고민 끝에 뒤늦게 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수업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 수업을 한 편의 극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수업 때 할 모든 말을 대본처럼 적고 외웠던 기억이 난다. 준비된 수업은 최소한 내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교사라는 느낌은 안 줄 것이기에, 남들보다 오래 연습을 했다. 몇 번이고 외우고 연습하고 녹음했다.
한편 말하기 불안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 살았던 세월보다 경상도에 살았던 세월이 훨씬 긴, 여자치고는 드물게 강한 사투리 억양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 기간제 교사로 수업을 하게 된 대치동의 고등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은 핀잔을 주셨다.
-아니, 김 선생. 서울에 산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사투리를 써요? 그래서 서울 학생들 가르치겠어요? 김 선생, 사투리 고치는 학원도 있다던데. 거, 그런 데 좀 다녀 봐요.
억양에 남아 있는 사투리의 흔적을 대놓고 그렇게 지적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쓰지 않으면서 감히 강남 한복판에서 국어 선생을 해도 되는 것이냐고 면박 주는 것만 같았다.
지방 출신임을 부끄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교감 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난 서울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 아니던가. 표준어의 과도한 지배성이라든지, 지역 방언의 가치라든지, 국어교육과 교수들도 다 사투리를 쓰던데요? 라든지 얼마든지 할 말은 많았지만 모두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견 맞는 구석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연습했다. 펜을 입에 물고 말해 보고, 혼자 집에서 거울을 보며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는 서울말 억양을 시도하곤 했다.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자들이 말하는 방식을 유심히 보고 모방하기도 했다. 말 잘하는 친구들의 말하기 방식을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보통의 다른 선생님들이 하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으로 수업하게 된 것은 교직을 시작하고 일이 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교직 경력이 쌓이며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까지 연습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수업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편하지는 않다. 말하기는 내게 즐기기보다는 부담스러운 대상이고, '이까짓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만큼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교사를 본 적이 없다. 천성이 교사와 맞지 않나 보군, 하고 생각한 날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찌하리. 수시로 얼굴이 벌게지던, 부끄러움 많이 타던 아이가 세상에 국어 선생님이 되다니!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많이 애썼을지. 장하다.
이제, 말하기는 예전만큼 높은 산은 아니다. 연습한 만큼 착실하게 나아지는 경험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말하기를 싫어하는 학생들을 무엇보다 잘 이해하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발표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편안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많이 고민하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말 잘하는 많은 선생님들 사이에 나 같은 선생님이 한 명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말을 못 하기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장점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아무 준비 없이 수업에 들어가도 청산유수로 말이 이어지는 그날을 꿈꾸며(하지만 왠지 그날이 안 올 것 같다고 내심 여기며), 그때는 대단치 않게 말해 보겠다.
말하기, 이까짓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