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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Aug 12. 2017

소로우와 장자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무위를 실천한 사람?

휴가를 가면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가져갔었다.

그중 한 대목을 읽다가, 소로우가 공자를 좋아했다던데, 어쩌면 노자와 장자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로우의 친구가 그에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왜 저축을 하지 않나? 기차만 타면 오늘이라도 당장 휘츠버그로 가 그 지방을 구경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소로우는 답한다. 나는 빠른 여행자란 자기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고.


그리고 소로우는 말한다. 그 친구와 누가 먼저 휘츠버그에 도착할지 시합을 한다면,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휘츠버그까지의 거리는 30마일(48km가량)이고 차비는 90센트(1845년경 즈음)일세.

이 돈은 거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네. 

바로 이 휘츠버그행 철로에서 노선 작업을 하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60센트였던 때를 기억하나?

내가 도로로 길을 떠나면 밤이 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지. 

그동안 자네는 기차 삯을 버느라 수고할 것이고 휘츠버그는 내일 아니면 잘해야 오늘 밤에 도착하겠지. 그것도 운이 좋게 일거리를 바로 구한다면 말이야. 자네는 휘츠버그로 가는 대신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일하느라고 보내겠지. 

그래서 여행을 하고 경험을 쌓는 일이라면 바로 그 때문에 자네와 나는 더 이상 알고 지내는 일이 없게 될 걸세. (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면서, 장자의 '기계가 발달하면 기계에 지배당한다'(장자: 천지(天地))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동이에 물을 담아 힘겹게 나르며 밭에 물을 주는 노인에게,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고랑은 적실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노인(이름: 포자)은 말한다.

그런 기계가 있으면,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쓸 일이 생기면, 마음이 기계에 사로 잡히고,

그런 마음은 순박한 마음을 밀어내고, 

순박함이 없으면 정신과 본성이 불안정해진다.

그런 정신과 본성에는 도(道)가 깃들지 않는다. 


하여 나는 몰라서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도가 깃들지 않는 것을 경계하여 쓰지 않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동양에서 자연(自然)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달리 유교에서 노자의 자연 개념이 천지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으로 인간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어쩌면 기계(機械)는 자연에 반하는 개념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자 계(械)의 연원은 나무로 만들어진 죄인의 손이나 발을 졸라매는 수갑이다. 그것이 후일 기계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때때로 문명이 진정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확신 있게 예스!라고 답하기엔 껄끄럽게 걸리는 대목이 있다. 바로 그에 대한 대답이 장자의 이야기는 아닐까.

여기서 기계를 돈으로 바꿔 얘기하면 어쩌면 더 확~ 가까이 피부에 와 닿기도 한다.

편리함을 추구하다 편리함의 덫에 걸리는 상황,

돈을 추구하다 돈의 덫에 걸리는 상황.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조금 숙고해 보면 근원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데, 

옆을 못 보게 눈에 가리개를 달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짐마차의 말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끌어야 하는 마차는 무엇이고, 왜 끌어야 하는지,

내 눈의 시야를 좁히고 있는 가리개를 치워버리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지...


우리가 처한 세상에서 모든 물질적 혜택을 거부하고 원시인처럼 산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끔은 멈춰 서서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차분한 시간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덫에 걸리지 않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며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리라. 



덧붙이는 말

소로우는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마을 근처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2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 기록이 월든인데, 그는 직접 집을 지으면서 건축자재 가격 명세서를 보여주며, 당시 학생들이 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내는 1년 치 집세면,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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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집을 짓는 일은 삶에 대한 태도를 구체적으로 결정하고 (어디서 살지? 어떤 집에 살지? 무엇을 하며 살지? 내가 필요한 공간은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축하는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돈으로 환산하여 사람에게 경제적 가치를 광고하며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위 사진은 원든 호수. 자료 출처:  https://fr.wikipedia.org/wiki/Étang_de_Wa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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