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 기독교의 발상지 '무덤 성당'(생 세풀크르
세풀크르 Sépulcre:
장례, 망자의 시신을 안치하는 의례와 행위, 무덤 공간과 망자의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를 포괄하는 의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시신을 올려놓았던 너른 바위,
그리스도의 장례 치른 뒤 모셔 놓은 동굴 무덤.
그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현된 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이 세 장소, 언덕, 바위, 그리고 무덤이 하나로 묶여, 그 위에 하나의 성당이 세워진다.
바로 예루살렘의 생 세풀크르 성당 Eglise du Saint-Sepulcre(불어).
이곳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뤄진, 기독교의 발상지이자,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담은 성지다.
우리말로는 '성묘 교회' 또는 '거룩한 무덤 성당'으로 부르고, 정교회 (동방 교회)에서는 '주님 부활 기념 성당'이라고 부른다.
위 그림의 빨간 번호 1번이 예수님의 무덤, 2번은 장례의식을 치른 너른 바위, 3번이 골고다 언덕이다.
3번 골고다 언덕의 중앙(심지처럼)에 검은색으로 튀어나온 형상이, 아래 그림의 A - 골고다 언덕의 바위를 일부 깎아 보존해 놓은 것이다. 아래 그림의 뾰족 튀어나온 부분이 십자가가 있던 정상 부분이다.
경당 (經堂):
본래 불교에서 불전을 두는 집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그 의미를 차용하여, 부속 성당을 뜻하거나 학교, 병원 등 일부 공동체에서 경배를 위해 설립한 장소를 이른다.
불어 단어는 샤펠 chapelle이 경당에 가까운 의미다.
무덤 성당은 대략 10년 후에는 그 역사가 2000년에 도달한다. 하여,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많은 굴곡이 있었고, 로마 황제의 박해, 페르시아의 침략, 십자군의 탈환, 그리고 여러 번의 지진과 화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훼손된 성당을 재건하고, 또 재건하며, 소유권의 대한 치열한 경쟁과 다툼이 있었다. 현재에는 총 6개의 기독교 종파가 무덤 성당을 나누어서 소유하고 있다. 그중 3개의 종파, 로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3개의 종파는 시리아 정교, 콥트교, 에티오피아 정교이다. 이들은 공간을 나눠서 소유할 뿐 아니라, 시간도 나누어서 다른 종파들이 각 경당에서 미사를 드릴수 있도록 운영한다.
재미있는(?) 상황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때부터, 두 이슬람 가정이 성묘 성당의 문을 열고 닫을 권리와 성당의 열쇠를 보관하는 권리를 나눠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권한이 유지되면서, 성당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 두 이슬람 신자들이 열쇠를 내주고, 열어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골고다 언덕은 채석장으로 쓰이다 버려진 공간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은 바위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땅을 파서 묻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채석장으로 쓰고 버려진 바위 속 빈 공간(동굴과 같은)에 죽은 이들을 장례 치른 뒤 안치하는 것이 예루살렘의 장례 문화였다.
채석장은 도시의 성벽 바로 바깥에 있었고, 죄인을 처형하는 골고다 언덕과 죽은 이들을 묻는 무덤은 모두 채석장의 장소들이다. 골고다 Golgotha의 의미는 해골, 해골의 장소를 뜻한다.
[자료출처:
아래 그림들은, 2013년 예루살렘에서 '생 세풀크르 (예수님의 무덤 성당)의 보물'이란 전시회를 위해, 유럽 왕실의 선물로 제작된 영상에서 발췌한 것이다. (베르사유궁 출처)]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76-138)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기독교의 성지를 지워버리고자 이 자리에 주피터와 비너스의 신전을 짓는다. '너희가 예수의 부활 능력을 믿느냐, 그 능력은 모두 나의 신전에 담길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정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꽂혀 있던 곳 위에 자신을 상징하는 신, 주피터(제우스)의 동상을 배치시킨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자리 바로 위에 비너스의 동상을 올려놓는다. 그 덕분에 정확한 위치를 찾아 복원할 수 있었으니, 하드리아누스가 오늘날의 무덤 성당을 정확하게 고증해준 셈이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274-337)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하기 전까지 기독교는 박해를 받던 종교였다. 헬레나가 예루살렘의 성지에 지어진 신전을 보고 신전을 허물고, 예수님의 행적 기리는 성전을 짓게 한다.
이때부터 당시 로마시대의 바실리카 양식이 성당의 건축양식으로 채택된다.
로마의 신전은 사제만 들어가면 되는 공간이라, 내부의 공간을 크게 고려하지 않지만, 기독교의 성전은 사제와 신자들이 다 함께 들어가서 교리를 듣고, 미사를 봉헌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로마의 공공집회를 할 수 있는 공공건물이 바로 바실리카였기에, 이를 그대로 성전건물에 적용한 것이다.
바실리카 건물의 왼쪽 끝, 중정의 한 구석에 작고 하얀 돔이 있는데, 이 부분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십자가 수난을 당한, 십자가가 꽂혔던 자리다.
하드리아누스가 신전을 지으면서 골고다 언덕을 깎고 채우면서 평탄하게 조성했기 때문에, 골고다 언덕의 일부 돌만 남았고,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기리는 경당(위 두 번째 그림의 C)에서 바위의 일부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
614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성당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1009년 이슬람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 Al-Hakim (985-1021)이 폐허가 된 무덤 성당을 몽땅 밀어버리자,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의 탈환을 기치로 내건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100여 년에 가까운 전쟁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만 고딕 양식의 바실리카로 크게 증축을 한다.
바실리카: 종교적 의미와 건축적 의미가 공존
(종교적) 특별한 종교적 가치가 있는 곳, 신비한 종교적 현상이나 사건의 발현, 성인의 무덤이 있는 장소 등 종교적으로 유서가 깊은 성당에 부여되는 명예칭호.
예를 들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정확하게 부르면 '성 베드로 바실리카'이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말 그대로 파리의 주교가 관장하는 주교좌성당, 카테드랄이다.
(건축적) 형태상으로 로마시대의 바실리카 건축양식은 공공집회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큰 공공건물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오랜 세월을 거치며 덧붙여지고, 고쳐지고, 헐어지면서 어떤 건축가의 작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축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건축사를 공부하면서 들어본 경험이 없었는데, 성당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성당의 기원이 바로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소 위에 지어지는 경배의 장소'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고, 결국 그 원조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현장,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 그 위에 지어진 생 세풀크르 = 예수님의 무덤 성당 = 성묘교회 = 주님 부활 기념 성당이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여, 순례 여행을 간다고 하면, 가장 일 순위가 바로 이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 그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인의 삶이리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도 삼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면, 언젠가 우리 삶의 순례가 끝나는 날, 그의 얼굴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길... 기도해 본다.
아래는, 33년경의 골고다 언덕 모습부터, 1099년 십자군에 의해 로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기본 형태 위에, 수차례의 복원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성묘 성당의 건축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는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kJ4Sa77JIw&t=1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