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37개 다리 이야기
나무로 된 다리, 돌로 된 다리, 콘크리트로 된 다리와 철로 된 다리, 다리는 당대의 최고 기술력이 모인 구조물이자 도시를 연결하는 기능성뿐만 아니라 도시의 미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다리는 사람들의 흐름과 교통을 제어하는 기능을 하며, 통행세를 받기도 하고, 통행을 관리하고, 경제력을 통제하는 중요한 권력 중의 하나였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강의 폭은 평균적으로 200미터 정도이다. 파리의 좌안과 우안을 연결하는 다리는 총 37개가 있다. 중세에 지어진 다리부터 지어진지 15년 된 다리까지, 총 400년에 걸친 다리의 역사를 알아보자.
시테섬으로부터 확장된 파리는 센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500년 전,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는데, 센강에는 총 5개의 다리만 있을 뿐이었다. 모두 시테섬과 좌안 우안을 연결하는 다리였는데, 좌안을 연결하는 다리는 2개 (작은 다리, 생미셸 다리), 우안을 연결하는 다리는 3개(노트르담 다리, 샹주(change; 환전), 방앗간 다리)가 있었다. 그중 방앗간 다리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다리 위에는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1층에는 상점이나 공방이, 그 위에는 주거가 있었다. 이 5개의 다리는 모두 나무로 된 것이었고, 강 위에 100여 개의 나무 말뚝을 박고 지어졌다. 그런데 센강은 강수량이 많은 겨울에는 더욱 물결이 세지고, 때론 초봄에 겨울의 얼음 덩어리가 나무 말뚝에 부딪치면서, 나무로 만든 다리는 20-40년이 지나면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또한 전체가 나무로 된 구조물이라 화재에도 약했다.
퐁 pont은 '다리'를 뜻하고, 네프 neuf는 '새로운'이란 의미다. 즉 퐁네프는 '새 다리'란 뜻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퐁네프는 파리의 37개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다. 이 다리는 16세기 최초로 돌로 지어진 것이고, 최초로 다리 위에 건물이 없이 지어진 다리다. 그래서 처음으로 파리 사람들에게 다리 위에서 강 주변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199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다리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에서 배경이 되어 더 유명해진다. 이 다리는 시테섬의 서쪽 끝에서 좌안과 우안을 관통하여 연결한다. 238미터의 길이, 20미터 폭의 이 다리는 지금도 파리의 다리 중에 가장 긴 다리이기도 하다. 1570년 앙리 3세 때부터 건설을 시작해서 30년이 지난 앙리 4세 때 공사가 끝난다. 퐁네프와 시테섬이 만나는 서쪽의 뾰족한 땅에 앙리 4세의 동상이 세워진다. 동상의 맞은편에는 삼각형의 도핀 광장이 조성되는데, 도핀은 왕세자를 뜻하는 단어로, 왕세자(미래의 루이 13세) 탄생을 기념하여 조성된 공간이다. 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당시 귀족들의 주거로 인기가 좋았다. 다리의 주변에 조성된 왕의 말 탄 조각과 광장은 최초의 도시개발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이후 앙리 4세는 지금의 보쥬 광장도 조성하는데, 이곳은 직물 산업을 유치하려는 목표로 건설된 최초의 도시계획 단지이다.
펌프 구조물이 퐁네프의 옆에 세워지는데, 다리 사이에 물살이 세지는 부분의 물의 힘을 이용해서 펌프가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이다. 퍼올린 물은 관으로 연결해서 루브르궁 내부와 왕실의 정원, 도심의 분수 등 수도시설에 물을 공급하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그 펌프의 이름을 사마리텐으로 지은 것은 예수가 우물에서 사마리아의 여인을 만나는 성서의 이야기에 기원한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불어로는 사마리텐 samaritaine이다. 19세기에 펌프는 철거되었는데, 그 이름은 사마리텐 백화점에서 호텔로 업종을 변경한 사마리텐 호텔로 이어져 온다. 퐁네프 이후부터 지어지는 다리는 돌을 사용하고, 다리 위에는 더 이상 집을 올리지 않는다.
18세기 후반,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력이 커지면서, 센강의 10개 다리는 충분하지 않게 되어, 더 많은 다리가 건설된다. 튈르리 궁에서 좌안으로 연결되는 루와이얄 다리와 퐁네프 사이에는 1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었다. 1801년, 나폴레옹이 건설한 예술의 다리는 루브르궁의 쿠흐 카레(사각 중정)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로, 마차가 지나다닐 수 없게 좁았다. 이곳에 관광객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걸었는데, 그 무게가 다리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워서, 얼마 전 자물쇠를 모두 철거하고, 난간도 교체했다.
예술의 다리와 110미터 길이의 루와이얄 다리 사이에 카루젤 다리가 세워진다. 이곳에서 센강 폭이 170미터로, 당시까지 가장 긴 퐁네프는 우안과 시테섬의 거리가 154미터이고, 나머지 좌안과 연결된 쪽은 78미터 길이였다. 즉 센강에서 가장 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카루젤 다리 바로 이전에 지어진, 콩코드 다리, 앵발리드 다리, 에펠탑 앞에 놓인 이에나 다리 등은 여전히 돌로 만들었는데, 19세기는 현수교 pont suspendu가 지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돌로 된 다리의 두꺼운 교각이 점차로 커지는 배의 원활한 이동에 불편을 초래하게 되면서, 새로운 해결책으로 현수교가 부각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카루젤 다리는 주철(1.7% 이상 탄소 함유한 철 합금)로 만든 튜브를 나무와 타르를 이용해 특수하게 만들어서, 주철의 약점을 보완하여 다리의 구조재로 사용한다. 1834년 당시 돌로 지어진 다리에 필요한 비용을 절반 이상으로 줄이면서, 공사 기간도 14개월로 단축했다. 앙투완 레미 폴롱소가 만든 카루젤 다리는 현수교의 원리로 3개의 아취형 교각 위에 지어진 우아한 형태로, 길이도 길면서 폭도 넓은 건축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놀랍게 성공한 다리로 칭송받았다. 이 다리는 100년 가까이 이용되다, 1930년 폭을 더 넓히고 더 큰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콘크리트 다리로 대체되는데, 이때부터 콘크리트 다리 시대가 시작된다.
파리에 점차로 많아지는 마차들로 다리는 점점 더 큰 무게를 견디며, 더 넓어질 필요가 있었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는 마차들이 좌안으로 내려가기 위해 다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 시기에 파리에는 15개의 다리가 더 건설된다. 다리가 기술력과 파워를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생미셸 다리에는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이니셜 N자를 새겨 넣기도 한다.
알렉상드르 3 세교는 센강에 최초로 교각을 세우지 않고 양쪽 강변을 연결하는 다리라는 기술적 혁신과 다리의 아름다운 장식이 조화를 이룬 파리의 대표적 다리이다.
1891년,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3세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다리이다. 150미터 길이, 30미터 폭의 철강으로 된 다리이다. 센강 중간에는 교각을 놓지 않아 강으로 다니는 배들이 전혀 제약을 받지 않고, 강에서 시야가 잘 확보되는 낮은 높이로 지어진다. 이 모든 조건들이 당시에는 혁신적인 것으로, 특히 강의 중간에 파일을 박지 않는 다리는 알렉상드르 3 세교가 센강에서 최초였다. 그리고, 50여 개의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된 기념비적 외관을 자랑하고, 1900년의 세계 박람회를 위해 건설되었고, 우안의 아르데코 양식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 좌안의 엥발리드를 연결했다. 다리를 장식하는 4개의 조각은 각기 다른 시대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샤를마뉴 때의 프랑스, 중세의 프랑스, 르네상스의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가 교량 입구의 기둥 앞에 앉아있다. 그랑 팔레, 프티 팔레 쪽에는 과학과 예술의 알레고리 조각이, 엥발리드 쪽에는 전쟁과 평화의 알레고리 조각이 기둥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다. 다리 위의 화려한 32개 가로등은 오페라 가르니에의 등을 제작한 곳에서 만든 것이다.
알렉상드르 3 세교의 건설은 4년 전 170미터 길이 미라보 다리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강철 다리 전문가 장 헤잘이 맡는다. 미라보 다리는 강변 가까이 파일을 박은 강철 다리다. 그리고, 이 다리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로도 유명하다.
이 다리는 하중을 강변에 기초를 놓아 해결하는데, 강변의 흙은 물 때문에 단단하지가 않아, 특수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강변에 커다란 박스를 단단한 땅이 있는 20미터가량 흙을 파고 물을 제거하면서 파내려 가서, 구멍 낸 곳을 돌로 채워 거대한 기초를 만든다. 이 방법은 에펠이 에펠탑을 지을 때 발명한 것인데, 센강에서 가까이 지어지는 에펠탑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같은 방식으로 기초를 지었다.
그 기간 동안 다리를 올리는데 필요한 부분들이 강철로 미리 제작되고 있었다. 즉 조립식 제작을 통해 미리 만들어진 부품들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다리의 조립에 200일이라는 단기 기록을 세운다. 총 다리 건설 기간은 2년 반이었다. 알렉상드르 3 세교는 정확하게 1900년 세계 박람회의 개관일에 맞춰서 완공된다. 퐁네프 다리가 종교전쟁으로 멈추긴 했지만, 공사의 완공에 30년이란 세월이 든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기간에 완공된 것이다. 알렉상드르 3 세교의 건설에는 당대의 최고 기술들이 동원되어서, 예를 들면 증기로 움직이는 기중기라든가, 조립식 다리가 빠른 시간에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파리 시민들이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20세기 초는 지하철과 자동차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다리도 함께 변해야만 했다. 이에나 다리, 베르시 다리, 콩코드 다리처럼, 기존의 다리 양 옆으로 폭을 확장하기도 하고, 다리를 다시 놓기도 하는데, 솔페리노 다리가 나폴레옹 3세 때의 주철로 된 것인데 약화되어 재건된다. 1999년 개통한 센 강의 36번째 솔페리노 다리는 튈르리 정원과 오르세 박물관 가까운 솔페리노 역을 연결한다. 처음으로 센 강변의 아래와 위를 연결하여 4방향으로 교차 이동할 수 있고, 교각이 없이 철과 나무로 만들어진 보행자를 위한 다리이다. 그런데 다리 개통식에서 진동이 심하게 발생하여, 흔들림 방지를 위한 균형추와 제동장치를 보완하고 재개통된다.
2006년에 센강의 37번째 시몬 드 보부아 다리가 보행자들을 위해 건설되어 좌안의 프랑수와 미테랑 도서관과 우안을 연결하며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