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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Aug 18. 2015

'목적'과 '목표'를 생각하다

직업진로체험을 진행하며...


오늘 고양시 모 고등학교 직업진로체험 강사로 참여했다.

건축사 체험반이 원래 32명이었는데, 2명 늘어서 34명이 됐다 한다. 체험 활동에 필요한 재료를 2~3인분 더 여유 있게 준비했기에 문제가 없었다. 이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건축사 직업체험을 마친 소감을 간단히 남기려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이고 기업체 강의까지 두루두루 하면서 각 연령대 별로 나타나는 특색이 있음을 알았다. 지적 호기심과 반짝반짝하는 반응은 단연 어린이들에게 많이 나타났고, 기업체의 성인들은 원리와 인사이트에 집중했다. 대학생들은 과제 지향적인 성향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즉 학점과 연결되지 않으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통은 그랬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나눌 필요도 있다. 고등학생들은 이제 얼마 후면 대학을 진학해야 하기에 좀 더 목표지향적이다. 건축가를 비롯한 다양한 직업에서 자신의 꿈의 방향이 비교적 명확하고, 궁금한 점도 구체적이다. '얼마 벌어요?' 이런 질문은 잘 안 한다. 현실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중학생들은 또 다르다. 넘치는 에너지와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 호기심을 넘어 치기 어린 질문들...

이런 게 수업시간에 그대로 나온다. 몇몇 초롱초롱 집중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곤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자신들의 에너지를 불태운다. 물론 수업과 상관없이 그러하다. 중학생들의 수업 분위기가 좋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때로는 이미 방전된 채로 엎드려 있는 녀석들도 꽤 된다. 해 보니, 자고 있는 그 아이들을 깨우지 않는 편이 선생님에겐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떠들거나 방해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나마 나은 고등학생들이었다. 게다가 고양시에서도 꽤 수준이 높은 학교로  소문난 곳이었다. 역동적이고 활발한 그들에게 마이크도 없이 강의했더니 목이 좀 따끔거렸다. 적당 데시벨로 얘기해야 목소리가 보호되는데, 이건 기본 소음이 이미 상당한 곳이었던 지라 평소보다 더 크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말하는 나는 그게 열정으로 승화(?)된 듯 느꼈다. 


그러나 듣는 친구들에겐 소곤소곤, 조곤조곤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지 않게 들렸을 수도 있다. 그중 1/3은 반짝거리는 눈을 나와 맞춰가며 집중했고 질문도 곧잘 했다. 또 다른 1/3은 그냥 그냥 듣는 듯했으며, 나머지 1/3은 자거나 또는 개별 활동을 했다. 집에 와서 고3 아들에게 물어보니 집중해서 듣는 수가 1/3이나 되었냐는 거다.

1/3이 집중해서 잘 들었다면 그건 아빠가 강의를 잘해서였기 때문이란다. 교육현장의 일선에서 뛰고 계시는 선생님들은 매일매일 이런 상황에 놓여 계시니, 한편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사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희망을 가지고 봉사하듯이 학교에서 요청하는 직업진로 체험에 가끔 참여하곤 하지만, 다시 요청이 온다면 또 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학교를 나오게 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원래 나는 전체를 위한 일제 학습이나 평준화 교육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인 능력의 발현을 더 기대하고, 재능이 훈련에 의해 더욱 숙련되는데 집중한다. 그러하기에 모두의 행동을 존중하지만, 오늘 학생들을 만나며 교육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내 정의로는 그렇다.


'목표'란 '가야 할 곳'이다. 

즉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방향을 정하고 떠나는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야 한다면 부산이 목표인 셈이다. 그런데, 걸어서 간다면 한 번에 부산까지 갈 수 없으니 중간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우선은 가까운 곳인 성남까지 잡는다면 성남이 첫 번째 목표가 되고, 다시 성남에서 용인, 용인에서 안성, 이런 식으로 목표를 정해서 가다 보면 결국은 부산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학생들은 가까운 목표를 정해 가고 있는 것인데, 그 첫 번째 목표가 대학 진학이다. 거기까지 부지런히 달려간다. 정말 밤잠을 안 자고 힘들게 간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대학을 들어간 이후 또 다른 목표가 생기는데, 대부분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한다. 취업을 한 이후 또 다른 목표를 정해서 달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늘 공허하고 마음에 쉼이 없다. '목표'는 이뤘지만, '목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이란 '왜?'이다. 

즉 이유(WHY)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부산까지 가야 한다면, 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에 따른 방법(HOW)은 다양하며, 방법 자체에 너무 몰입하지 않아야 한다. 방법 역시 목표(WHAT)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것은 목적(WHY)이다. 누구나 삶의 시기에 따라 일정한 목표(WHAT)를 이루며 산다. 그러나 '목적'이 없이 사는 인생은 늘 공허하다. 왜(WHY) 거기를 가야 하는지, 즉 왜 그 목표(WHAT)를 이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길이 험하고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HOW) 역경을 넘을 힘을 잃지 않게 되고, 결국 목표에 도달할 때 꿈꾸던 목적도 이룰 수 있게 된다. 가야 할 이유도 없이 길을 떠나게 되면 만나는 상황에 따라 길을 포기하거나 여정을 바꾸기도 한다. 목적이 목표에 앞서야 할 이유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강이 있고, 다리를 놓는다면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할까? 징검다리? 돌다리? 나무다리? 철골로 만든 다리? 또는 콘크리트 다리? 우리는 거창해 보이는 것이 좋은 다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다리를 놓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강을 건너는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목적은 강을 건너는 것이고, 목표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다. 멋지게 100m짜리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어 목표를 달성했어도 그게 강을 건너가는 방향이 아니라 강을 따라가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다리라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리를 만든 이는  그동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목표 달성을 했어도 공허할 뿐이다. 따라서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더 큰 목표를 세우게 된다. 200m짜리 다리를 만들어야지, 아니 500m짜리 다리를 만들어야지 등등.... 그러나 아무리 규모가 커도 강을 따라가는 그 다리로는 결단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그 한계 내에서 작은 돌멩이를 던져가며 어설프게라도 징검다리를 만들면 강을 건널 수 있게 된다. 즉 능력 범위 안에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능력의 여유가 좀 더 있다면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너면 된다. 능력이 있을수록 더욱 안정된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목적을 먼저 세우고 그 후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인생의 낭비가 없다. 젊은 시절부터 이런 목적(방향)이 서지 않은 채 목표(방법)만을 이루기 위해 힘을 소진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때가 되면 후회와 한탄만이 남을 뿐이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 집 없이 사는 것은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고통 속에서도 집 장만을 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절약해서 땅을 사고 집을 지어야 한다. 성공한 인생을 보장받고 싶다면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입신양명을 위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차근차근 가야 한다.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매일매일 일정한 목표를 두고 운동을 하며 체력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목적과 목표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순서가 명확하다. 목적이 있고 난 후에라야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면 오히려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목적이 없는 목표는 허상일 수밖에 없고, 목표를 이룬 후에 목적을 찾는 것은 인생 허송세월 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학생들은 어떤가?

삶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직업진로체험 역시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한 삶'이란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야 의미가 있다. 직업이란 하나의 목표일 뿐이니까. 현실의 상황을 생각하면 글을 쓰는 나도 한숨이 먼저 나올 뿐이다. 행여라도 이 글에  도움받은 이가 있다면 한나절 시간이 아깝지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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