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도시, 다른 방식의 삶
전 세계가 아직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전래에 없던 유형의 바이러스로 모든 나라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고 빠른 수습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열심을 내어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어느 나라에선 이렇게 하더라 저렇게 하더라 하며 참고하기도 하고 각 나라의 환경에 맞추어 특색 있는 방역을 생활화하고 있다.
생활 방역 부분에 있어 파리에 사는 이방인인 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민족성에 따라 같은 정책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다.
우선 프랑스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다. 유럽이 그러하듯 워낙 이동도 많고 문화적 교류도 잦다 보니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가장 쉬운 예로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끼는 민족은 점퍼를 입고 다니고 더위를 잘 느끼면 거의 헐벗듯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한다. 한 계절을 같이 보내고 있지만 내가 더우냐 추우냐에 따라 한겨울 옷을 입기도 하고 한여름 옷을 입기도 한다.
더 재밌는 것은 사람들 반응이다. 신기해서 쳐다보는 사람은 나 혼자 뿐,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옷차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유로운 부분이 많다. 소위 말하는 겉치레가 없다. 실제로 정장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중에는 회사의 중역들이 많다. 누가 뭐래도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
반면, 한국에 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무언가 남들과 다르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타인의 시선 때문에 힘들었다. 같은 듯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는, 참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한국에서 춥다고 한여름에 점퍼를 입는다면 어떻게 될까? 길을 나서자마자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시선과 몇몇 어르신들의 꾸중 아닌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고, 누구는 예능을 촬영하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성은 이번 팬데믹 상황에서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마스크를 끼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지켜야 할 코로나 안전 수칙이다.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수칙이 알려진 후 나타난 두 나라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에서 마스크를 낀다는 것은 건강상 상당히 문제가 있거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낀다는 인식이 있다. 따라서 마스크를 끼는 행위는 프랑스 사회에서 그리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환자가 아닌데 왜 마스크를 껴야 하지? 환자만 착용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모두 다 착용을 안 하고 평상시처럼 생활하였다. 마스크 착용의 유무와 상관없이 평소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녔고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 프랑스는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활동을 해도 하루에 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 한국은 프랑스 뉴스에도 자주 언급이 되며 방역에 있어선 슈퍼세이브라 할 수 있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이렇게 집단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 결정적인 빛을 발한다. 특히 여기에 잘하고 있다는 서로 간의 격려와 응원이 있었으니 집단의 힘은 더 좋은 쪽으로 발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상황이 변하고 있다. 바로 사람의 본능을 참는 임계점이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어서 그렇다. 여기서 두 나라의 정책은 조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바로 본능의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인식의 차이다.
2020년 9월 11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총리를 통해 보건 관련 회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주 내용은 바이러스와 싸우면서도 우리의 사회, 문화, 경제적 삶과 아이들의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더 개개인의 위생수칙에 각별한 유의를 하라며 발표를 마쳤다. 개인적으로 이 발표를 들을 당시 지난 3월처럼 다시 한번 국가의 통제아래 자가격리를 시행하지 않을까 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비껴갔다. 세상에 바이러스가 아직도 만연하지만, 멈출 수 없는 생산활동,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만 생활이 가능한 맞벌이 부부의 삶, 회사에 가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직종, 산책을 하고 싶은 욕구, 외식을 하고 싶은 욕구, 등 사람의 기본욕구와 본능을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개인의 위생에 유의하라는 주의와 함께 코로나와 함께 살며 싸우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삶의 욕구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분명 느리지만 확실하게 개인의 삶과 집단의 이익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이 희생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다.
이러한 국민성은 사는 도시에도 적용이 된다. 개인의 욕망을 중시하는 이들은 도시를 바꿀 때 오히려 급진적이지 않고 상당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며 바꾸어 나간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삶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보라 생각한다. 마을에 의자 하나 놓는 것부터 도로를 새로 바꾸는 것까지, 다 밀어버리고 새로 덮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들을 지켜가며 추가하는 방향으로 개발한다.
삶의 욕망을 반영하는 건축
우리 모두는 도시 안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개인의 삶의 형태는 너무나 다르다. 삶의 다름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누차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삶의 다양성만큼 공간의 다양함은 없다. 다만 구분은 있다.
‘어디에 살더라’, ‘얼마짜리더라’ 하는 식의 삶의 구분이 과연 건강한 정신에서 나오는 구분법일까?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 아파트 아닌가? 아파트 가격으로 삶이 등급이 매겨진다. 아파트에 사는 삶이 문제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파트를 지을 때 다양한 삶의 방식에 따른 평면구성이 없다는 게 문제다. 삶의 방식이 다름을 표출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공간을 구성하는 행위인데 이것이 막히니 구분을 짓고자 가격과 브랜드로 점철된 아파트만 나오고 있다.
삶의 표출은 인간의 욕망이다. 자신의 삶을 잘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때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절제하고 또 절제하여 남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절제인가? 무분별한 표출을 막기 위해 건축가, 디자이너 같은 전문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전문가의 식견 또한 절대적이지 않기에 서로 다른 전문가와의 협업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 누구도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
숲이 푸르다 하여 한 종류의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도시에 산다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모두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명의 건축가와 도시설계사만으로는 우리의 도시와 우리의 건축을 바꿀 수 없다. 모두가 함께 그러나 각자의 의견을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건강한 도시와 건축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