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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쌓아올리다, 임당 상가아파트

한 페이지씩 보는 나의 건축노트

by 김민현







들어가며


저는 초반에 건축을 공부하며, 주택만이 건축가가 지을만한 주거유형이라고, 왜 한국에는 이리도 아파트만 많은 것이냐고, 환경이 좋지 못하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지만, 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점차 한국 건축사를 알게 되며 지금의 모습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맞는 주거유형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큰 감명을 가져다 준 아파트가 있었으니, 바로 한양가든테라스입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안타까운 아파트입니다.



저층부에 상가가 있고 고층부에 아파트가 있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상복합이라는 유형은 상가에 비해 주거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또한 거리에 대해서 베타적이죠.

한양가든테라스는 거리에 면해 있으면서 가로의 활력에 기여하며 상가는 입주민과 인근지역 주민 또한 혜택의 대상으로 삼는, 조금 더 친밀하게 상가와 아파트가 혼합된 "상가아파트" 유형이었습니다.


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저는 한국건축의 희망을 본 듯 했습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죠.


ps. EBS-한양가든테라스


그러다 발견한 책이, "가장 도시적인 삶" 입니다.


황두진 건축가가 지은 이 책은, 서울을 중심으로 지어진 옛 상가아파트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들을 "무지개떡 건축" 이라고 부르는 데요, 입지,규모,복합,보행자친화성,형태 5가지로 나눠 "무지개떡지수"를 매깁니다.

그는 옛 상가아파트에 우리가 본받아야할 점이 많으며, 이런 주거형식이 우리나라에 맞는 가장 도시적인 삶을 얻게 해줄 것이라 말하죠.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주거유형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우선 단독주택은 기본밀도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보편적 유형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기존의 단지형 아파트는 의외로 토지 이용의 효율도 높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도시의 기본에너지인 거리의 활력에 기여하지 못한다.

기존의 다가구, 다세대, 연립주택들은 기본밀도는 어느정도 충족하고 도시맥락의 유지에도 공헌하지만 대부분 주거 단일용도인 경우가 많아 거리에 대해서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즉, 도시의 기본밀도를 충족하면서 복합기능을 통해 거리의 활력에 기여하고, 도시의 기존맥락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상주인구와 유동인구의 적절한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유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떡건축" 이다. 그리고 그 시원적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상가아파트" 다"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건축 中-



저에게 가장 익숙한 유형은 단지형아파트 였는데요, 이는 널찍한 땅에 건물들이 섬처럼 모여 주변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상가형아파트는 건물과 거리가 밀착되어 있습니다. 교통은 물론이고 주변 풍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 맥락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유형이었죠.


책을 읽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 했습니다. 직접 보러 나가봐야 겠죠.

다행히도, 건축만큼 쉽게 보며 공부할 수 있는 학문도 없겠습니다.


이제부터 넘기는 건축노트는, 저의 상가아파트 답사이야기 입니다.





임당상가아파트


위치: 강릉시 임당동 67-1

건축가: ?




8월 31일 슈퍼문이 뜬다는 날, 강릉 시내로 외출을 나갔습니다.

목표는 강릉 구시가지를 걸어다니며 상가아파트를 직접 보는 것이었는데요.


대도호부관아의 돌담을 따라 쭉 걷다가 임당동성당을 지나 들어가면 마을 곳곳이 벽화로 장식된 오래된 동네, 임당동이 나옵니다.

이곳은 구시가지인지라, 오래된 아파트가 참 많습니다. 답사 장소로 제격이었죠.


그렇게 걷다가 만나게 된 친구가 "임당상가아파트" 입니다.


처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건물 뒤쪽의 풍경이었습니다.

어둑한 저녁, 2층 앞마당에 있는 주민이 나무와 수풀들에 둘러싸인 채 빨래를 널고 계시는 모습이었죠.

항상 주택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던 마당의 낭만이 북적북적하고 휘황찬란한 간판이 가득한 도심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어딘가 이질감과 함께, 좋았습니다.


건물을 자세히 보기 위해 정면으로 향합니다.



임당상가아파트의 스케치


山 모양으로 1층은 상가, 2-5층은 아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눈여겨 볼 만한 점은 역시나 돌출된 상가부이겠습니다.


무엇이 좋을까요?


1. 2층세대 각각이 자신만의 마당을 가질 수 있습니다.

2.상가부의 빛과 소음이 직접적으로 주거부에 닿지 않습니다.

3. 지면에서 주거부로의 시선이 차단되어 프라이버시를 지킵니다.

4. 상가부와 주거부를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어떠신가요? 정말 작은 디테일 하나만으로 많은 것이 변화는 건축, 참 재밌지 않나요?


상가아파트는 상가라는 공적인 기능과 아파트라는 사적인 기능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조율이 중요하다는 점 또한 알 수 있겠습니다.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먼저, 상가부는 6칸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중 2칸은 아파트 입구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건물은 山 형태로 양쪽 대칭이고, 건물 뒤로는 상가가 없었으므로, 각 상가가 건물 전체 폭으로 길게 4칸 나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까 본 2칸의 아파트 입구는 전체가 계단실을 품고 있는 탑 (코어) 이라고 생각됩니다.

탑의 반복되는 창과 다른 부분의 창이 반층씩 엇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건물로 진입하는 동선은 각 상가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탑을 통해 각 세대로 진입하는 것. 이렇게 분리됩니다. 이처럼 상가아파트에서 동선의 분리는 꼭 풀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각 주거세대는 양쪽 대칭인 마당으로 보아, 아마 건물의 긴 방향으로 중복도가 가로질러 가고 기준 양쪽으로 두 세대씩 위치할 듯 보입니다.


이제 아파트의 입면을 자세히 볼까요? 입면의 디자인은 지금 보아도 몹시 세련됐습니다.

모더니즘의 전형 같달까요.


그림을 보시면 각 세대의 창은 베란다창과 작은 창으로 이루어져 있죠. 특이한 점은 작은 창은 이를 둘러서 전벽돌이 붙여져 있습니다.


과연 그저 디자인일까요?


일반적인 아파트 평면을 생각해볼 때 베란다창은 그 안에 거실이 있을 것이며, 작은 창은 방으로 이용되겠죠.

그렇다면 입면의 디자인을 통해 거실과 방이라는 내부의 기능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디테일에서 건축가가 심상치 않은 분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임당상가아파트에서의 하루가 궁금해졌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1층 고깃집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하고, 주변은 어둑한 저녁에도 찬란한 조명과 함꼐 북적북적 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위의 주민들은 잔잔함이 깔린 마당으로 나와 직접 심은 채소들을 가꾸고, 따서 저녁을 해먹기도 하겠죠.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방에서는 부모님이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시겠죠.아니면 1층에서 이웃주민들과 술잔을 기울이실 지도요. 이들 그리고 식당주인은 모두 친할 겁니다. 한 공동체이니까요."


주거,상가,녹지,공동체. 마치 하나의 마을 입니다.

마을을 수직적으로 구축하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며 임당상가아파트를 나왔습니다.



-2023.09.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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