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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의 도시, 낙원빌딩

한 페이지씩 보는 나의 건축노트

by 김민현






들어가며


아직은 햇볕이 강했던 9월 중순, 휴가를 나온 저는 하고 싶었던 서울 상가아파트 답사를 위해 중구로 향했습니다.

한가로운 오후에 커피 한잔 들고, 카메라를 맨 채로 거니는 서울은 참 좋더군요.

세운상가, 피어선아파트, 정동아파트, 효자아파트 등,, 다양한 아파트를 봤지만 단연 인상적이었던 아파트가 있는데요, 바로 낙원빌딩 입니다.


우리가 흔히 낙원상가라 부르는 이곳이 사실은 상가아파트라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조차도 직접 답사를 하기 전까진 믿지 못했으니까요.


오늘은 그래서 더욱 재밌었던, 제가 발견한 이 아파트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려 합니다.


이어지는 상가아파트 답사노트 그 두번째 페이지, 낙원빌딩 입니다.




낙원빌딩


위치: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

건축가: 연합건축




낙원쁼딩. 이것이 낙원악기상가의 원래 이름입니다.

실제로 낙원빌딩은 단순히 악기상가가 아닌, 상가와 아파트. 그 이외에도 여러 기능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적인 상가아파트입니다.

저는 이 아파트를 답사한 후 "도시 속의 도시" 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요, 건물 전체가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하나씩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낙원빌딩 스케치


여러분은 낙원빌딩 하면 어떤 장면이 생각나시나요?


아마도 건물 아래를 도로가 지나가고 가운데에 횡단보도가 있는 이색적인 장면이 먼저 떠오르실겁니다.

낙원빌딩은 도로를 내기 위해 지어진 건물입니다. 하부를 지나가는 왕복 4차로는 "삼일대로" 라는 이름인데요.


"건물이 놓인 삼일대로는 북악산과 응봉자락에 걸터앉은 가회동에서 시작한다. 도심을 거쳐 한남동과 강남 일대를 지나 경부고속도로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간선도로다. 그야말로 국토의 척추에 해당하는 길이다."


"낙원빌딩의 건립과정은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말, 폭격에 대비해서 만든 소개지가 있던 터에 낙원시장이라는 재래시장과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다. 여기에 도로를 내야 했던 서울시는 시장상인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당시 시장은 '불도저' 김현옥이었다. 시장 상인들 중 상당수는 지주였고, 그들은 '낙원상가주식회사'를 만들어 상황에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시행사와 시공사를 겸한 역할은 평양 출신 실향민이 세운 대일건설이 맡았다. 민간투자 유치를 위해 그들에게 이익구조도 만들어줘야 했다. 결국 상인들은 대규모 상가와 아파트를 건립하도록 허락했다..."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 中-



그렇게 상인들은 낙원빌딩으로 이주했고, 아파트도 여러 사람들에게 분양되며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점은 "국토의 척추"에 해당하는 길이 건물 아래를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의 범위는 단순히 그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무한하게 넓어지는 것이죠.


건물 가운데에는 삼일대로와 함께 왕복2차로가 직각으로 만나며 교차로가 만들어지고,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분명 나는 건물 안에 있지만, 차가 앞으로 지나다니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경험은 이질적임과 동시에 하나의 도시 같다는 생각을 더했습니다.


이제 건물의 전체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건물은 대지 위에 지어지고 토지세를 내죠. 하지만 낙원빌딩은 도로 위에 지어진 건물이므로 그 대신 도로점용료를 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됩니다. 하천 위에 지어져 하천점용료를 내는 "서소문아파트"와 비슷합니다.

대부분 대지를 따라 형태가 결정되는 건축. 하지만 낙원빌딩은 이 "도로"가 건물의 형태에 많은 영향을 미친 듯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건물 하부매스(상가)가 필로티로 한 층 띄워져 도로를 따라 형성되고, 그 위에 상부매스(아파트)가 도로 축에서 약간 틀어져 있기 때문에 낙원빌딩을 외부에서 보면 어디서나 약간 불편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


틀어져 있는 이유, 아시겠나요?


제 생각에 이건 하부의 삼일대로로 인한 소음과 진동을 차단함과 동시에 상부 아파트를 지지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코어와 기둥들을 배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ps. 해당 부분은 도로에 대응하는 설계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거리를 면해서는 같은 축을 기준으로 2층 악기상가 입구와 -1층 지하시장 입구가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속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물 흐르듯이 건물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낙원빌딩은


-1층: 지하시장 / 2,3층: 악기상가 / 4,5층: 사무실,창고,극장 / 6-15층: 아파트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시장, 악기상가 그리고 극장 등은 거리에 면해서 계단이나 엘레베이터가 위치해 있어 쉽게 접근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파트 입구는 동선의 분리를 위해서 건물 하부교차로 쪽에 숨겨져 있는데요. 마음먹고 찾지 않는 이상 외부인은 눈치채지 못할 듯 했습니다.

엘레베이터 또한 상가와 극장용은 아파트 층까지 가지 않도록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 손에 들린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조심스럽게 아파트 입구를 향했습니다.

입구에는 아파트를 지을 당시의 건물 명패와 마감석이 유리장 안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놀랐던 점은 너무나 고급스러운 서양풍의 로비였습니다. 은은한 노란빛의 등이 빛나고, 유리블럭 앞으로 금도장 살과 나무난간으로 된 계단이 올라가는 로비는 당시 이 아파트가 어느정도 수준이였는지 가늠하게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아파트 내부에 꼭 들어가보기로 결심한 건 책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이었는데요, 바로 내부의 중정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6-15층 아파트 중 9-15층은 거대한 중정으로 되어 있고, 이를 둘러 세대들이 배치된 구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직접 보기위해 계단을 올랐습니다. 9층에 이르자 갑자기 계단실의 작은 창문으로 은은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중정이구나.




압도되는 모습, 중정




계단실에서 나오자 눈 앞의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내 발 밑에서 10층 높이로 올라가는 거대한 중정,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뿌연 천창을 지나 쏟아지는 부드러운 햇살. 그 공간을 무수한 세대 복도들이 좌우로 둘러싸고, 앞 뒤로는 전층을 아우르는 거대한 벽이 있었습니다. 약간 누런빛을 띄어 따뜻한 느낌이었던 벽에는 거대한 조각장식이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더욱 경건함 혹 경외감 같은 종교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내가 지금 정말 아파트 안에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었어요.


책을 읽고 알았지만, 벽면의 조각 장식은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직접 만든 것이라 전해진답니다,, 도대체 그 시대에는 무슨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무엇보다 중정이 주민들에게 어떻게 사용될 지 궁금했습니다. 이 정도 높이로는 다양한 행사를 열 수도, 회의를 할 수도 있을텐데요. 가능하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오래되어 낡고 흉물이라고도 불리는 낙원빌딩이지만, 제가 보기엔 어디하나 부서진 곳 없이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낙원빌딩은 워낙에 잘 지었기로 정평이 나 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전진단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합니다.

처음부터 잘 지어 오래도록 고치고 수선하며 쓰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또한 놀랐던 점은 책에서 본 대로 내부의 깔끔한 관리 상태였습니다.

상가아파트를 답사다니며 든 생각이지만, 낙원빌딩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보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삶이 다채로울까요.

꼭 단독주택에서 살아야 좋은 주거가 아니라, 이런 도시적인 삶도 좋겠구나. 했습니다.


책에 나온 낙원빌딩 주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생활하기 정말 편하다. 모든 것이 가까이 있다. 책을 사고 싶으면 교보문고라는 동네서점에 간다. 아프면 가까운 서울대학병원을 향한다. 산책하고 싶으면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가 지척이다. 택시와 버스, 지하철은 온 사방에 널려 있다. 근처에 교동, 재동, 운현 등 유서 깊은 초등학교도 여럿 있다.

장은 어디서 보냐고? 건물 지하가 시장이다. 그러니 내 집 냉장고가 클 필요도 없다. 근처에 먹을 곳, 마실 곳은 차고 넘친다.

주민 상당수가 건물 내 혹은 인근에서 일한다. 살아 있는 직주근접의 현장이다. 어지간한 시내 중심부의 직장은 걸어서 출퇴근한다.

건물이 동서로 길어서 아파트는 중정을 중심으로 남향과 북향이 선명하게 나뉜다. 대체로 노인들은 남향을 선호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경관이 좋은 북향을 마다 않는다. 남쪽으로는 빌딩 사이로 남산이 보이는 정도지만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궁궐이 눈 앞에 펼쳐진다.

9층 중정은 일종의 마을 광장 역할을 한다. 주민 회의에 해당하는 '낙원아파트주민자영회' 가 여기서 열린다. 총 149가구 중에서 많을 때는 아흔 명 정도가 참석하여 장관을 이룬다. 아이들이 뛰거나 공을 가지고 놀기도 해서 이를 자제해 달라는 '동네다운' 안내문이 붙어 있다."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 中-



-2023.10.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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