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공간이 될 때

건축의 쓸모

by 이재준

처음에는 단지 선이었다.

연필로 그은, 얇고 흔들리는 선.


종이 위에서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었다.
비례를 맞추고, 창의 위치를 옮기고,
벽 두께를 계산하며 상상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걷고, 앉고, 웃을지를.

그런데 어느 날,
그 선들이 벽이 되고, 창이 되고,
햇빛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도면 속 숫자들이
진짜 그림자와 온도를 가진 공간이 되었다.

내가 그린 선 위로 사람이 걸었다.


아이의 웃음소리, 식탁 위의 찻잔,
바닥에 떨어진 빛 한 조각까지.


그때 알았다.
건축은 ‘그린다’라기보다 ‘빚는다’는 것을.
머릿속에서, 종이에서, 그리고 흙 위에서
조금씩, 아주 느리게 다듬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그 집이 완성된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벽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운 콘크리트와 벽돌의 표면아래에
내 시간과 생각과 꿈이 묻혀 있었다.


건축의 기쁨은 완성에 있지 않다.


그 완성까지의 모든 순간에,
‘불가능해 보이던 선’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그 경이로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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