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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r 10. 2016

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세번째. 광복에서 분단까지 04 4.3 항쟁

제주 4.3 민중항쟁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민족분열의 징후가 명확해져 감에 따라 조선 민중의 투쟁은 보다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농촌에서는 「야산대」라는 무장소조가 조직되어 지서 등 관내 행정기관 및 악질적인 반동분자들을 공략하는 투쟁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이러한 민중들의 무장투쟁은 제주 4.3민중항쟁을 통하여 직접적인 대규모 무장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제주는 외세와 봉건세력에 항거해 왔다. 또한 타 지역에 비해 해방 이후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의 귀환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들은 해외에서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진보적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 조직을 시작으로 각 지역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와 함께 대중단체가 잇달아 조직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사회를 목표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45년 9월 28일 제주도를 점령한 미군은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체시키고 친일세력들을 기용하면서 민족반역자들을 중심으로 경찰등 각종 폭력기구를 창설하였다.

1946년 1월 15일, 미 군정은 그동안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제주 도민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해 오던 구일본인 재산을 강탈하여 미 군정의 재산으로 몰수하여 갔다. 


이런 미 군정의 악질적행위를 지켜 보았던 미국인 Mark Gayn은 그의 저서 <Japan Diary 일본일기>에서 


나는 번뇌와 부끄러움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는데 있어서 

단연 으뜸간다 할 수 있을 야만적인 경찰 국가가 우리 국가(미국)와 함께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라고 토로하였다. 

1945년 12월 12일 밤, 미군의 사주와 지원을 받는 친일 반역자들로 조직된 「한라단」이라는 조직이 미군의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조직을 유지하고 있던 제주도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여 방화와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제주시민들이 「테러 배격」을 외치며 도 군정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미군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한라단은 또다시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폭력을 휘들렀다. 

이에 격분한 인민위원회 자위조직인 보안대가 출동하여 한라단을 소탕하여 버렸다. 

그러자 미군과 경찰은 인민위원회를 급습 포위하여 50여명의 애국적 시민들을 검거,투옥하였다. 

1947년 3월 1일 제주민중은 3.1 운동을 기념하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당국은 육지로부터 경찰 지원병력을 투입하는 등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대회를 폭력적인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다. 

그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어린소년이 죽고 많은사람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제주민중들은 3월 9일부터 일제히 총파업 투쟁에 궐기하였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시장의 상인들은 단체철시로 민중들의 총궐기에 합류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정청 직원들을 포함하여 도내 각경찰지서원들과 재판소의 직원들까지도 발포경찰의 처단과 경찰책임자의 인책파면을 요구하며 민중들의 파업투쟁에 동참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 군정은 무장경찰관과 서북청년단(이하 서청),대동청년단(이하 대청), 민족청년단(이하 족청), 독립촉성국민회(이하 국민회)등 악질적반민조직들을 투입하여 민중들을 살육하고 탄압하였다. 

악질적조직인 서청, 대청, 족청, 국민회 등은 

「우리는 제2의 모스크바, 제주도를 공격하러 온 멸공대다」 라고 큰소리치며 살인, 강간, 약탈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미군과 경찰, 그리고 반민조직들의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살인적 탄압에 대항하여 제주민중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자위투쟁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애국적인 제주민중들의 자위투쟁은 제주도 전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음모가 확실해 지던 1948년 초에는 보다 짜임새 있는 무력저항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핵심적인 유격대 조직이 행정의 말단지구까지 만들어지고, 민중의 저항자위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가 주도면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는 한 발의 총성과 함께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의 불길이 올랐다. 

제주 민중들의 항쟁의 불길이 솟은 것이다. 

제주 4.3 민중항쟁의 무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 발의 총성은 분단을 획책하는 망국적인 5.10 단독선거 음모를 분쇄하고, 미군과 반동적인 경찰, 반민조직들을 소탕하기위한 공격개시의 신호였다. 


무장대는 다음과 같은 7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2. 망국적인 단독선거 절대반대 

3. 투옥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 

4.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7. 조선 통일 독립 만세 


이어서 무장대는 전 제주도민과 모든 권력기관 및 반동단체의 성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경애하는 부모형제 여러분! 

4월 3일 금일, 여러분의 아들 딸과 형제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적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찾기위해! 

여러분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한 압제자와 그 하수인의 압제의 사슬을 풀기위해! 

여러분의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위해! 

저희들은 오늘 분연히 떨쳐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몸을 던져 싸우는 저희들에게 협조하시고 저희들과 함께 조국과 민중이 인도하는 길로 결연코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경찰관 여러분! 

탄압하면 항쟁할 뿐이다. 

제주도 빨지산은 민중을 수호하고 민중과 함께 한다.

항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민중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 여러분! 

하루라도 빨리 선(조직선)을 찾아가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직장을 수호하며, 악질 동료와 최후까지 용감하게 투쟁하라. 

양심적인 경찰,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는가? 

조선 민중이라면 조국과 민중을 유린하는 외적을 내쫒는 투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반역자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총구는 놈들에게 향하라. 

결단코 여러분의 부모 형제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여 4.3 제주민중항쟁은 시작되었고 무장부대들은 한라산을 무대로 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주 민중들의 4.3 무장봉기에 기겁을한 미 군정 경무부는 4월 5일 「제주도 지방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고, 4월 24일에는 각 도 경찰청의 지원을 받아 총 1,700여명의 토벌경비대를 조직하여 제주도에 급파하였다. 

토벌 병력의 증강과 동시에 '제주도 지방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고 제주도 전역에 게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제주 유격대들은 한라산 밀림을 근거지로 하여 용의주도한 전술을 펼치면서 도처에서 토벌대를 격파하였으며 일반 민중들도 경찰의 살벌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유격대를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그리고 미 군정에 대한 분노와 반동적 경찰과 반민조직들의 피의 학살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양심적 경찰들이 유격대에 투항하여 합류하는가하면 미 군정의 직원들까지도 항쟁의 대열에 합류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제주민중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승리의 희망을 안겨 주었던 것은 국방경비대내의 애국적장교와 사병들의 뜨거운 동포애와 동지애의 발휘였다. 

미국과 이승만 일파가 기도하는 망국적 단독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여 끝까지 조국의 자주통일과 생존권을 지키려는 제주민중의 항쟁을 진압하러 온 국방경비대 장병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제주민중들의 격한 애국적열기에 부딛히자 전의를 상실하고 제주 민중들을 동정하여 오히려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 소령은 


동족상잔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며 쌍방의 화해 교섭을 호소하였다. 

이런 김익렬 소령의 호소의 노력으로 유격대 대표 김달삼과 제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위한 회담이 성사되었다. 

유격대 대표 김달삼은 다음과 같은 4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1. 단독선거 단독정부수립 반대 

2. 경찰의 완전 무장해제. 경찰토벌대의 즉시 철수 

3. 반동 테러단체의 즉시 해산, 서북청년단의 즉시 철수 

4. 피검자의 즉시 석방, 부당한 검거 . 투옥 . 학살의 즉시 중지 

김익렬 소령과 김달삼 유격대대표의 회담결과, 양자간에는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어 유격대는 4월 30일 오후 5시를 기해 무장해제를 할 것에 쌍방간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의 개가된 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시하에 경찰이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쌍방간 이루어졌던 모든 회담의 성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회담은 무산되었으나 국방경비대와 유격대와의 평화적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으며, 특히 9연대의 문상길 중위와 5연대 2대대장 오일균 등을 중심으로 유격대와 상호정보를 공유하며 협력하면서 경찰의 출동요청을 거부하고 엄정한 중립을 지키며 오히려 경찰토벌대의 횡포와 테러집단의 무자비한 살육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당황한 조선의 군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미 군정장관 딘소장은 1948년 5월초 토벌에 소극적인 김익렬 소령을 해임하고 적극적인 유격대 토벌작전을 지시하면서 제9연대장에 박진경 대령을 임명하였다. 

박진경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명령하고 악질적 경찰과 서청등 우익 깡패집단과 협력하여 제주민중을 탄압하고 살육하려 하였다. 이런 박진경의 작전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로 하사 등은 병사 100여명과 함께 궐기하여 박진경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도처에서 경찰토벌대를 진압한 뒤 한라산에 입산하여 유격대와 합류하였다. 

문상길 중위를 중심으로 한 9연대 장병들의 거사는 유격대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전 제주도민을 열광시켰을뿐 아니라 국방경비대내에서 잇따라 애국적장병들의 동조세력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5월 10일 단독선거는 제주도에서도 강행되었다. 

제주 민중의 모든 역량이 단독선거 저지에 모아진 가운데 투표일 당일 읍사무소, 신한공사, 경찰지서 등이 습격되고 투표거부의 선전물이 온 거리를 뒤덮었다. 

막강한 유격대와 각 지역의 자위 조직인 자위대는 각지의 선거사무소와 투표소를 습격하여 선거인 명부, 투표용지, 투표함 등을 불 태웠다. 

제주도에서의 5.10 단독선거는 완전히 분쇄되었다. 

대부분의 투표소에서는 아예 선거조차 치루어지지 못하였고, 투표가 가까스로 이루어진 지역의 투표함에는 단 몇표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제주도 투표율 70%는 완전 허위로 날조된 거짓말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5.10 단독선거 전국 투표율 93% 또한 전혀 믿을수도 근거도 없는 거짓이라는 사실도 입증되는 셈이다. 

제주도에서의 단독선거의 좌절은 미국과 이승만 도당의 민족분열 음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토벌계획 또한 국방경비대 장병들의 애국적인 토벌 방해공작과 1948년 10월 20일 제주도 진격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의 봉기 등으로 많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미 군정의 전면적인 토벌작전은 군내 저항세력들이 어느정도 뿌리 뽑혀진 1948년 11월이 되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미 군정 지휘하의 토벌작전은 유격대와 일반 주민이 거의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전개되어 무고한 양민들의 숱한 희생을 불러왔다. 

이승만,조병옥,신성모등은 제주를 초토화시킬것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조병옥의 명령에 따라 제주도 전 섬을 상대로 방화, 초토화, 소개작전을 구사하여 유격대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삼광작전, 불태우고, 죽이고, 굶겨없애는 삼진작전, 유격대건 아니건 무조건 집단학살하는 묻지마식 살육작전, 빨갱이 색출을 명목으로 한집한집 샅샅히 쓸어버리는 로울러 작전, 최대한의 살상을 지상목표로 삼는 몰살작전 등등 갖가지 악질적이고 반인륜적인 무자비한 오로지 살육만을 위한 온갖 작전방식이 다 동원되었다. 

항쟁의 섬 제주도는 점점 피의 바다 속으로 잠기어 갔다. 

제주 민중항쟁은 1949년 12월 유격대의 90 % 이상이 궤멸되었고, 200여명의 잔여 유격대는 한라산 깊숙히 숨어들어가 간간히 빨지산 투쟁으로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로 유격대의 조직이 남군유격대와 북군유격대로 다시 재건되어 적극적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6년까지 활동을 보였던 유격대는 1957년 마지막 유격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리에서 생포됨으로서 위대한 제주도민의 4.3 민중항쟁의 그 비극적 끝을 맺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조병옥의 지시에 의한 경찰토벌대의 살육작전에 의하여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피해는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조차도 없다. 

1963년 조사된 제주도 당국이 발표한 사망자 수만도 80,065명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의 인구가 26만여 명이었음 감안할 때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들이 군경의 강압적이고 악랄한 진압작전으로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다. 

15,000 가옥의 방화, 소 78,000두, 말 22,000필, 돼지 29,000마리가 도살되었고 그외 약탈당하고 소실된 재산이나 곡물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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