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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y 16.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경주

열아홉. 경주 이야기 01. plologue 천년왕국 신라에서 조선까지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체제인 고조선의 유민들이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와 산골짜기에 6개의 마을을 조성해 오순도순 모여 살았다.


경주시 탑동 일대 양산촌은 경주 이 씨의 시조 알평공이 촌장,

경주시 내남면 일대 고허촌은 경주 최 씨의 시조 소벌공이 촌장,

경주시 외동면 일대 진지촌은 경주 정 씨의 시조지백호공이 촌장,

경주시 서면 일대 대수촌은 경주 손 씨의 시조 예마공이 촌장,

경주시 감포읍 일대 가리촌은 경주 배 씨의 시조가 촌장,

경주시 천북면 일대 고야촌은 경주 설 씨의 시조 호진공이 촌장.  


6명의 촌장들은 하늘에서 왕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다, BC 69년 큰 박이 뚝 떨어지고 박을 깨니 어린아이가 있다.

이름은 赫居世혁거세(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고 오래 살라는 뜻).

BC 57년 6명의 촌장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徐羅伐서라벌(동이 터서 태양이 제일 먼저 비추는 성스러운 땅)을 건국한다.

도읍에 맞는 성을 지어야 겠다.

남산아래에 금성 짓고 이사한다.

남산은 진산으로 494m(서울의 남산은 262m)의 웅장한 산으로 경주를 에워싸고 있다.

신라 四靈地사영지(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전, 북쪽의 금강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산을 비롯한 경주에 원효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석궁이야기다.


신라의 승려 원효가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터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내가 깎아주겠네”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이는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왕실의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楡橋유교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와 마주쳤다.

거짓으로 물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대로 묵게 하였다.

과연 과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이다.

-輿地圖書여지도서, 조선후기


조방제(동서남북으로 죽 줄을 긋고 그 줄을 도로로 삼아 도시를 구성하는 것)로 360만평의 도시계획에 들어간다.

동서로 바둑판처럼 선을 긋고 바둑판 한칸을 1방(坊:가로 160m 세로 160m)으로 마을 구획단위 한다.

경주 면적이 360만평이니까 360방이되는데 각도 360도를 기준이 된것이다.

1방에 30가구를 배치하고 가구당 200평씩 나눠주고 나머지 4000평은 도로가 된다.

1방에 30가구, 가구당 15명씩 잡으면 450명이 모여 살았던것.

당시는 3대가 모여 살아서 당시 경주의 인구는 17만 명정도로 예상한다.

지금 경주 인구는 27만 명.

나라가 번성해서 서라벌 제4대왕 탈해왕이 계림이라 고치고 제14대왕 기림왕때 새로운 서라벌이라는 뜻의 신라新羅로 개명한다.

신라는 992년 지속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본래 신라의 옛 수도였다.

한나라 五鳳오봉 원년에 신라시조 혁거세가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야벌이라고 하였으며(그 뒤부터는 방언으로 왕경을 서야벌이라고 통칭) 또는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 때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것을 나라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이 다시 신라로 고쳤다.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 김부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 하였다.


경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야 얻은 이곳을 回龍顧祖회룡고조(용이 돌아서서 조상을 돌아본다)형이라고 하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혔다.

통일 이후의 안정기가 1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반란이 빈발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결국 신라는 9세기 말부터 지방세력의 반란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 그리고 연이어 계속되는 자연재해라는 3중의 수탈에 시달렸고, 이는 국가 재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 통일 후 수도를 중앙으로 옮겨 四方邊民사방변민을 통제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수습하여 요동만주의 부여땅까지 우리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거란, 여진이 국경 밖에서 커질 수 있겠는가.

통일 당시 군신이 국토의 한 귀퉁이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서북의 땅만을 인적(隣敵)에게 주기를 헌신짝처럼 하였으니 고려 말까지 7백년동안 옛 강역(疆域) 내의 형극을 제거하지 못하여 하루도 편안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이다.


신라가 고려에 병합된 이후 새로운시대를 열게된 고려가 개성(개경)으로 수도를 옮기게 됨으로써 역사의 중심무대는 경상도에서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으로 옮겨졌고, 경상도지역은 앞 시대에 누린 한반도 역사의 중심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럼 경상도가 어떻게 다시 바통을 이어 받았을까.

일단, 경주, 안동, 성주 지역은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서 고려 왕조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지만, 상주나 문경 등은 왕건의 적대 세력인 견훤의 출신 지역이어서 고려 중기까지도 토착세력의 진출이 거의 없었다.

무신정변을 계기로 하여 경주 출신의 김부식 일파는 몰락하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영해 박씨, 순흥 안씨, 성주 이씨, 경주 이씨, 상주 김씨 같은 경상북도 출신의 신흥사대부 집안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정치와 학문 쪽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던것이다.

그래 공민왕이후, 나라에서는 영남을 일컬어 「인재의 곳간」이니, 「국가 재부의 원천」이니 하여 중시하게 되었고,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는 유행어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랜시간이 흐르면서도 타지역에 비해 고대왕국지역의 모습을 유지 할수 있었다.

경주는 왕릉만 37개에 古墳고분(지배층 무덤)도 990기 있고 땅만 파면 지금도 문화재가 나온다.

그래 죄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어서 개발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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