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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y 19.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동묘

스물하나. 촉한의 장군 관우의 사당, 동묘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지점의 환승역 동묘.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 關羽관우를 모시는 廟宇묘우로 정식 명칭은 東關王廟동관왕묘다.

한국인들에게 소설 <삼국지연의>는 필독도서나 다름없이 읽혀지고 있다.

14세기 원나라 말기 羅貫中나관중의 소설이 해방 이후 박종화ㆍ김구용ㆍ이문열ㆍ황석영ㆍ장정일 등이 독자 적인 번역과 해석을 바탕으로 간행되어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관왕묘는 중국 후한 말기 위ㆍ오ㆍ촉 삼국이 각축을 벌일 때 촉의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관우가 관왕ㆍ관제로 숭배되므로 關帝廟관제묘라고도 불리었다.

관우는 關聖帝君관성제군, 關菩薩관보살이라고도 하며, 武運무운과 財運재운의 수호신으로 중 국인의 신상 대상이었고, 당나라 중기부터 武神무신으로 모셔져 나라 제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왜 중국 촉한의 장군을 사당까지 만들어가며 모시게 된 걸까?

1598년 겨울, 임진왜란 지원병으로온 명나라 장군 陳寅진인이 울산에서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관우의 숭배자였던 그는 완쾌 뒤 관우의 음덕이 있었다 하여 관우의 소塑像상을 개인적으로 봉안하여 받들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함께 참전했던 명의 여러 장수가 돈을 내고 우리 조정에서도 건립 비용을 보태 1598년 5월에 사당을 완공하였다.

이것이 남관왕묘인데 남묘는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1601년 명의 神宗신종은 사신 편에 조서(詔書)와 4천 금의 건립 기금을 보내와 묘우 설립을 강력하게 종용하였다.

關公관공은 원래 英靈영령이 비범하여 임진왜란 때 귀국을 음으로 도움이 지대하였으니 廟묘를 세워 그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대문 밖에 터를 잡아 관왕묘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동묘이다.

선조 35년(1602) 봄의 일이었다.

숙종 17년(1691)에 부분적인 개수가 있었으며, 영조 15년(1739)에도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1883년 북묘 창건.

1902년 서묘 창건.

1909년 서묘 철거하고 동묘에 합사.

1913년 북묘 철거하고 동묘에 합사.

6.25전쟁 이후 인사동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서민들이 황학동으로 밀려 들어 벼룩시장이 되는 통에 건물을 폐쇄한다.

건물은 폐쇄시키면 건물은 쉬이 훼철된다.

그 후 2009년 부터 3년 동안 복원되어 개방한지 얼마 안돼 동묘의 상태는 좋다.

명나라의 청에 의해 勅建顯靈昭德王關公之廟칙건현령소덕왕관공지묘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광무 연간에 고종이 顯靈昭德義烈武安王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 안왕성제묘라는 현판을 달았다.

동묘는 담장으로 에워싸인 장방형의 대지에 건물들이 남북 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남향하여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면서 가운데 3칸의 지붕이 양옆의 1칸보다 높은 솟을지붕이다.

정면 5칸 가운데 중앙의 3칸은 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고 좌우 한 칸에는 벽돌로 옆면을 막고 살문을 단 마루방을 들였다.

지붕의 마루에는 모두 양성을 하고 취두와 용두를 올려놓았다.

대문 좌우로는 작은 일각문을 두었는데 이 문은 바로 담장으로 연결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네모지게 쌓은 석단이 보이고, 맞은편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으며 정면 앞쪽에 중문이 마주보인다.

앞쪽 모퉁이와 가운데 놓인 세 마리 돌짐승(해치와 사자)을 다듬은 솜씨가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솜씨 그대로여서 퍽 중요한 의미와 상징을 간직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중문 안뜰 좌우에는 대칭으로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안쪽에 정전이 서 있다.

정전은 건립 당시 중국의 관여가 있어서인지 평면 구성, 외부 마감, 지붕 구조가 우리 건축과는 무척 다른 중국식 건물이다.

본실의 중앙 뒤편으로 석단을 마련하여 나무로 만든 관우의 상을 안치하였다.

석단 앞으로는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을 포함한 4명의 무인상이 서 있다.

* 사진은 1열 주창 관평상, 왕장군 조자룡상, 사시관우상 2열 우장군 장비상, 생시 관우상, 황보장군 황충상

유비 관우 장비상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동무와 서무.

벽돌벽 중간에 기와 한 장 너비로 눈썹지붕이 가지런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으로, 무슨 기능인지는 알수 없다.


동무의 북편 끝 칸에는 네모진 화강암 받침에 목조건축 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은 비석이 있다.

武安王廟碑무안왕묘비.

178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앞면에는 사도세자가 짓고 쓴 글이 가벼운 흘림체의 행서로 되어 있고, 뒷면에는 정조가 짓고 쓴 글이 또박또박한 해서로 새겨져 있다.

서무의 북쪽 끝 칸에 위치한 비석은 숙종과 영조의 글이 씌어진 것으로, 앞면의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이라고 전서로 쓴 전액과 행서의 본문은 숙종의 글과 글씨이며, 뒷면의 顯靈昭德武安王廟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해서의 비액과 가벼운 흘림이 있는 해서체 본문은 영조의 글과 글씨이다.

보물 제142호.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38-1.

남묘는 동작구 사당동 현충원 뒷산으로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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