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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Feb 13. 2016

인문 건축가의 건축 이야기 VI 독립기념관

2대째 이어가는 군부 껍데기건축

독립기념관


5공화국 초에는 박통과의 차별화를 위해 반일정서를 활용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바로 응수한다.

당연히 재임당시의 토목, 건축의 업적도 필요했고.

문화적인 이벤트를 계속 만들어가던 중 독립기념관에 꽂힌거다.

1982년 8월 31일 국민성금을 모금한다.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36년의 수모를 생각하면 독재는 참아도 일본이라면 이를 간다.

8살 코흘리개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눈물겨운 성금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복수심


몇 달 만에 430억이 모인다.

일단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문화로 돌리는데는 성공했는데 잘못 처리했다가는 정권이 흔들리는거다.

한국인의 치부인 일제 침략기의 국민적정서로서의 감성...

청와대에서 두 가지 지침이 내려왔다.


첫째, 독립기념관 대지는 서울과 대전사이로 할 것.

둘째. 현 대통령이 준공식에서 테이프 커팅 할 수 있도록 86년 8월 15일을 디-데이로 할 것.


4천만 국민이 동의하는 100만평의 땅을 빨리 찾아 독립기념관을 지어라.

청와대에서는 날마다 독촉이고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게 생긴거다.

자칫하면 삼청교육대 가게 생겼으니 박종국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의 사무처장은 머리에 쥐난다.

아직도 부지는 찾지 못했고....

결국 생각해낸것이 도지사들에게 두 곳씩 추천할 것을 채근하는 공문을 보낸다.


치열한 로비전

40년 동안 오지로 천대 받은 강원도,

당시까지 강원도에 못지 않게 처져있는 제주도,

정권에 밀려 기를 펴지도 못하던 전라도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라 로비가 엄청났다.

추진위원들은 피가 마르는 시간속에  몇 년 전 자료를 들춰보니 문화방송에서 독립기념관을 용인에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추진위원에 김원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그래 건축가김원에게 독립기념관 터를 부탁한다.

건축은 김수근선생이나 김중업선생을 생각했지만 일본에서 교육받았으니 우선 일본냄새가 나는 건축가는 배제한다.

하지만 김소장은 43년생이니 해방당시 3살이라 예선탈락된다.

김원, 남산 한국의 집으로 가서 30여 개 후보지를 검토하고 즉석에서 5개를 골라낸다.

5군데 모두 충청도.


우선 청주 상단산성.

10만여 평으로 명당이긴 한데 너무 좁다고 하자 청원군수는 히든카드를 내민다.

흑성산 아래 목천면 공원묘지로 허가를 내주면 군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관계로 공원묘지로 쓰겠다는 허가신청이 들어왔는데 이곳을 추천한다.

좌청룡 우백호 명당이다.

바로 문공부 허문도차관에게 보고하자 다음날 이진희 장관에게 불려간다. 경기고 동문.

그래 다음날 아침 이장관, 박처장, 김소장과 위원들은 흑산성을 찾고 그 날 청와대에 보고된다.

바로 3일만에 청와대로 호출.

똑같은 헬기 3대.

한대에 대통령이, 다른한대에 경호원이, 마지막 한대엔 기타등등...

흑산성으로 이동한다.

안산이 겹겹으로 교배를 하는 지형이라 산이 깊고...아침마다 흑성산에게 절을 하는 형상이라...어쩌고저쩌고

부지가 결정이 되고 김소장이 언론을 맞아 내용을 정리하고 이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청회를 열게된다.  

김원소장이 프리젠테이션.


광복회 할아버지가 독립기념관에 기와를 얹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

현상설계 공모하여 당선작 김기웅.

대학동기인 김기웅이 당선사례로 자가용 바꿔 줬다고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난리가 났었다.

87년 8월 15일 준공식전에 겨레의 집에서 불이 났다.

한국전쟁때 자리 잡은 미 공군 레이더기지와 중정, 보안사, 각종 방송사들의 레이더, 송신탑들이 7개나 어지러이 널려있는 흑성산 정상을 정비한다.

519m 높이의 흑성산은 중부권 통신의 중심이다.

정상 3,000평에 봉수대가 복원된다.

제주도 현무암으로 성벽이 조성되고 기와가 올려진다.

긴 대지를 우선 남성南城, 북성北城, 중간봉으로 나눈다.


남성은 상징적인 전시공간.

북성은 전시기념공간으로 옥외공간, 해돋이광장, 기념전당, 헬리포트를 두고

중간봉은 탐방객 편익시설로 식당, 기념품판매소, 전망대, 사슴사육장, 주차장을 둔다.

1단계 공사로 남성은 1986년 12월 준공.

2단계 중간봉 개발과 3단계 북성 개발이 완료되면 독립봉 정점으로부터 드럼페스티발이 펼쳐지고 봉토의 봉화불이 피어오른다.

흑성산성의 성곽과 기념, 상징탑(안테나), 공심돈空心墩, 노대(弩臺 쇠뇌를 설치해 적에게 활이나 돌을 쏘려고 성안에 높게 지은 대), 전망대展望臺, 일주문一柱門, 봉돈烽墩이 재현된다.

특히 상징탑은 20m 높이의 장승 4개와 60m 높이의 솟대를 세워 삼남의 중심임을 강조한다.

소박하고 단순한 장승의 원초적인 형상으로 민중의 얼굴과 탈이 지닌 한민족의 표정을 재현한다.

장승과 솟대는 민족의 염원이 깃든 독립기념관의 상징이며 악귀를 물리치는 주술적 기념물이다.

연간 천만 명을 동원해야 하지만 요즘은 연간 백만 명 채우기도 힘들다.

그러니 흑성산 정상까지 관광객이 올라올리 없고 적자가 된다.

각종 편의시설은 문을 닫고 봉수대의 연기도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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