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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Jun 17.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미대사관저

스물일곱. 120년 동안 버틴 미 대사관저 Habib house

덕수궁 석조전과 별관의 연결지점 뒤쪽으로 돌아가면 키 큰 마로니에 뒤에 布德門포덕문이 있다.

포덕문의 원래 이름은 덕수궁의 서문인 平成門평성문이다.

평성문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고종이 화재를 피해 중명전으로 피신할 때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애초의 포덕문은 서울 시청을 바라보던 자리에 있었던 문인데,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문은 사라지고 그 편액만이 평성문에 걸리게 되었다.

평성문은 현재 미국 대사관저인 Habib house 하비브 하우스와 마주 보고 있다.

① 조원문 ② 경효전 ③ 영복당 ④ 양심당 ⑤ 포덕문 ⑥ 소방계 ⑦ 전무과 ⑧ 승헌부 ⑨ 평성문 ⑩ 구성헌⑪ 돈덕전 ⑫ 만회당 ⑬ 환벽정 ⑭ 영성문 ⑮ 선원전 ⑯ 사성당 ⑰ 혼전


정동일대는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즐비 했던 곳이다.

영국영사관(1884년)과 러시아공사관(1885년), 첫 외교공관을 다른 지역에 잡았던 프랑스공사관(1889년)과 독일영사관(1890년)도 뒤늦게나마 정동으로 터를 잡았다.

여기에 느지막히 외교관계를 수립한 벨기에영사관(1901년)도 그들의 첫 공관을 이곳에 둠으로 정동 일대는 자연스레 각국외교의 중심가로 자리매김되어 일찍이 정동길을 일컬어 Legation Street 공사관 거리로 불리웠다.

그러나 다른 여타의 공관이 타 지역으로 이전 함에도 미국 대사관저는 120년이 넘도록 복원해야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래 이 자리는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계호(閔啓鎬)의 사저(정동 10번지 현 미국대사관저의 위치)를 구입하여 미국공사관 및 공사관저로 사용했다.

1882년 미국과 제물포 조약이 이루어진 장소는 당시 제물포의 임시막사였다.



초대 미국공사로 임명되어 우리 나라에 부임한 사람은 Lucius Harwood Foote 푸트 공사로 국공관원 일행은 박동(洞)에 있던 독일인 Paul George von Moellendorf 묄렌도르프의 집에 잠시 거처하였다가 이내 貞洞정동에 있는 민씨 일가의 집을 사들였는데, 이것이 곧 미국공사관의 시초이자 정동이 서양인촌으로 변모하는 출발점이었다.


幼學 閔泳敎 유학 민영교의 瓦家 와가 141칸과 空垈공대(빈터;나대지) 250칸,

翰林 閔啓鎬한림 민계호의 와가 120칸과 공대 300칸,

金監役 김감역의 와가 9칸과 草家초가 6칸 및 공대


이렇게 앞의 필지를 1884년 五千兩오천량(2200달러 상당)을 주고 푸트공사가 사들여 공관과 사저로 사용한다.

그리고 미 의회승인이 난 1887년 4400달러에 푸트공사에게서 미 의회가 재매입한다.

이어 1890년 세번째 땅을 매입하고 1948년 3 필지를 추가 매입하여 지금의 대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푸트 공사 이래로 줄곧 사용해왔던 한옥구조의 미국공사관건물은 그 후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용케도 철거되지 않고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미국대사관은 정동 지역에 두지 않고 세종로 32번지에 쌍둥이 빌딩 신축하여 좌측 건물엔 경제기획원이(이후 문화관광부가 사용), 우측 건물엔 미대사관 입주하여 원래의 미국공사관(즉, 일제시대의 미국영사관)은 미국대사관저로 전환하여 사용하게된다.


1976년 5월에는 1971년 한국 주재 대사에 취임한 Philip Charles Habib 하비브 대사가 전통한옥양식에 따라 새로운 미국대사관저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Habib House 하비브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이때 공사를 맡은 분은 1970년 불국사 복원공사를 맡았던 이광규 도편수.

이로 인하여 예전의 미국공사관 건물은 게스트 하우스로 용도가 바뀌었고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하비브하우스느 2012년 초 언론에 처음 공개된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안한 곳 중의 하나에 든다.

러시아, 프랑스, 일본공사관과 영국총영사관 건물들은 일본인과 중국인 청부업자들이 유럽건축물을 모방하여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그 외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개수한 것이었으며 한옥은 개수하기에 매우 편리한 구조들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잘 다음어진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워 올린 건물이었다.

벽은 진흑이나 벽돌로 되어 있어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쳐진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농리고 그 위에 기와를 씌워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

우리 공사관의 대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탑처럼 지붕이 솟아 육중한 성의 대문을 연상시킨다.

이곳을 나서면 바로 선교사들의 정구장이 나타나고 곧이어 영국인 구역과 황제의 새 궁전이 보였다.

대문의 양편에는 과거 전통복장을 입은 보초병들이 지키는 초소가 있으며, 가마꾼과 인력거군과 더불어 밤낮으로 교대근무를 하는듯했다.

대문으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편으로 안뜰을 반 가까이 차지한 단층의 창고가 있으며 이것은 때때로 아시아 함대에서 파견된 해병대원들이 묵을 막사로 쓰였지만, 나는 실제로 해병대가 활동할 필요가 있었던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안뜰을 둘러싼 공간에는 넓은 잔디밭과 큰 집이 산만하게 늘어져 있는데,공사와 그 가족들이 이곳을 사용하였다.

- Undiplomatic Memories 비외교적 비망록, William Franklin Sands 윌리엄 F. 샌즈(1898년 미 공사관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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