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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y 26. 2019

세계의 건축가 I I. M. Pei

; 20세기 후반 세계 최고 건축가 Ieoh Ming Pei 아이엠페이

지난 5월 16일 마스터 건축가의 별세 소식이 미디어를 통해 전해졌다.

많은 건축가들이 그의 부고를 전했고 명복을 빌었다.

최초, 최고의 타이틀을 갈아엎으며 잔잔히 디자인을 이어온 건축가.


Ieoh Ming Pei(貝聿銘)

프랑스의 Le Grand Louvre 루브르 피라미드로 바로 떠올리게 되는 디자이너.

프리츠커상은 물론 RIBA(영국왕립건축가협회) 로열 골드메달, AIA(미국건축사협회) 골드메달, UIA(국제 건축가 연합) 골드메달 등 4대 그랜드슬램을 수상한 형태론적 건축가.

국립문예예술연구소의 Arnold W. Brunner Grant(아널드 브루너상) 수상자.

American Academy and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 미국 예술 문예아카데미 건축상 수상자.

수 없이 많은 수식어가 따라왔던 건축가.


한, 두 가지 에피소드와 후담으로 그의 이야기를 열어본다.

business로 만나본 건축가가 아닌 유일하게 사석에서 두어 번 봤던 건축가다.

당시 받았던 Portfolio도 아직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20년간 일해왔던 한 건축가와의 함께 8년간 건축을 한 인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받았던 Portfolio

2000년대 초반까지도 I. M. Pei 사무실에 가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비서분이 자리를 지켰다.

수십 년간 바로 그 자리에서.

세월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그 느낌은 한 없이 편안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최고의 건축가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90년대의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건축가라는 직업 삽화로 올라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 사이에선 대명사로 작용을 했다.

당연히 미국을 대표하는 자존심이었다.

여기서 우리나라와 미국이 얽힌 웃지 못할 재밌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뉴욕의 주 U.N. 대표부에 관한 이야기다.

내놓라 하는 세계의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 디자인을 했지만 I. M. Pei는 한 작품도 없다.

1991년 UN에 가입 후 부랴부랴 사무실을 개설했지만 정식 건물이 필요해 건축가를 물색 중이었다.

당연히 I. M. Pei는 거절했다.

재밌는 사실은 그는 건축주의 상황도 고려해서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수준은 그의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여곡절(이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나와 함께 8년을 같이한 건축가와 실제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어야 하므로 생략) 끝에 I. M. Pei는 단 한 번의 대한민국 정부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멋진 건축물은 맨해튼 335 E 45th St. 에 서게 된다.

안을 살피면 주 홀 천정은 한옥 대들보 디자인은 차용하고 창호도 우리의 그것에서 땄다.

정원의 소나무는 반듯한 모양이 아니고 우리의 소나무를 한그루 식재했다.

이밖에도 요소요소에서 우리나라를 알릴만한 아름다움을 차용했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미국을 건드린 셈이다.

자신들의 대표 건축가가 전 세계 각 국가의 얼굴인 UN대표부를, 그것도 동양의 별 볼일 없는 한국의 그것을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이에 새로 신축을 준비하던 미국의 UN대표부에는 어마어마한 건축가들이 물망에 오른다.

I. M. Pei와 양대 산맥이었던 Philip Johnson은 디자인을 할 상황이 아니고... 결국 2009년 별세한 Charles Gwathmey의 디자인이 현재 UN 미 대표부로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결과가 맺혀지지는 않는다.

건축가가 우려했듯 우리의 UN대표부는 뉴욕 영사관과 공유건물이 되면서 껍데기야 그대로지만 내부는 엉망이 되었다.

그저, 건축물의 용도를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간단히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과 밖이 하나로 연결된 단 1개의 단체를 위한 공간을 2개로 쪼갠다는 것은 그냥 Design Decoration에 불과하다.

I. M. Pei가 처음 설계를 거부했던 이유다.


사실 억지로 연결 짓자면 I. M. Pei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타개한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는 MIT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Pei 사무실에서 일을 했고 그 사무실에서 만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을 했다.

8살 연상의 줄리아도 2016년 10월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Jacqueline Kennedy와 Pei

I. M. Pei는 어쩌면 준비된 건축가라 할 수 있었다.

1917년 중국 광저우에서 유복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이오 밍 페이는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공과대 건축과로 편입한 그는 1940년 그곳에서 건축학사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대학 건축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과정 중에는 근대 건축의 거장 중 한 명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46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신혼여행을 미국 최고의 셀럽들이 즐기는 호화 유람선을 선택해 몇 달간의 교류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미테랑 행정부와 루브르 박물관 증축에 대한 미팅을 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는 비행기 좌석에 관한 에피소드도 있다.

자신의 수행 건축가들의 좌석 전체를 비즈니스석 이상으로 해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자고...

이것은 그간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동양계 미국 건축가에 대해 비하하고 반대하던 것에 대한 함께 일하는 동료에 배려인지 모르겠다.


그는 건축가로 젊은 인턴에게 생각의 전환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80m 복도 벽을 이음새 없이 디자인하라.


1983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건축물 중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어떻게 고르겠나. 아이가 여럿 있는 부모와 마찬가지다.
각자의 단점도, 성격도 다르다.


사실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대표작인 그랜드 루브르, 뱅크 오브 차이나, 미호 미술관(앞에서 올렸다)에 대한 디자인 전개 과정을 본다면 지금 결과물에 박수는 탄성과 환호가 더해질 것이며 젊은 건축가들은 방향을 다시 잡으려 할지 모른다.

1983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상금 10만 달러로 중국 건축가 지망생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그의 작품 이야기는 정리해볼 생각이다.


I. M. Pei의 명복을 빌며...



미호 미술관

https://brunch.co.kr/@architect-shlee/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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