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고 세우고 묻고 생각하는 곳에 진리가 있다
어제 다녀온 한 건축학도의 졸업전시회의 여운이 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한 뇌회한 퇴임교수의 말과 함께 새벽의 작은 생각에 미친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
어떤이는 사회적 퇴직으로 늙기 시작하고
또 어떤이는 가정을 꾸리는 시기에 그러하고
다른 어떤이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렇기 시작한다
이는 비단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식해가는 기독교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70년대의 한국 기독교를 욕하는 이는 없다
지적 무장으로 세계속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박형룡, 박윤선, 한철하 등 뛰어난 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신학자들도 교수란 사실만으로 존경받았다.
인문으로 무장한 그들은 한국 교계를 이끌었다
지금의 한국 교회의 신학은 신학자들이 아니라 교단 정치가들이 좌지우지한다.
머리수 채우기와 보다 많은 헌금의 확보가 대한민국 교회의 현실이 되었다.
결국 이런 교회의 성장이 아닌 확장은 신학을 저평가 하게되고 신학의 저평가는 모든 지식, 이론, 지성으로 연장되었다
교회에서 지식인들의 위치는 헌금 많이 하는 기업인들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들에 한참 못 미치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반지식적이 되어 있고 반지성적이다
지식의 저평가는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교단의 정치목사들은 주장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 찾는 지혜는 십자가의 도에 비해서 어리석은 것이며 (고전 1:22-25),
당대의 학문을 대변한 철학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속임수나 다름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골 2:8).
2세기 때 교수 Tertullianus터툴리아누스는 Credo quia absurdum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라하고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믿음의 도시)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믿음의 세계에는 지식이 설 자리가 없다 하였다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는 crede, ut intelligas 알기 위해서 믿어라라고 하였고 Anselmus안셀무스도 Credo ut intelligam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하였다
모두 믿음이 지식에 우선하고 믿음이 있어야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지 지식의 종교가 아라는것이다
이제 역설 paradox에 봉착한다
그런 주장을 펼친 바울, 터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가 모두 당대에 뛰어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고 칼빈은 23살 때 쓴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에서 라틴 저자만 해도 55명이 인용했다
그들 외에도 기독교는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카이퍼, 바르트 (K. Barth), 틸리히 (P. Tilich), 니버 (R. Niebuhr), 도여베르트 (H. Dooyeweerd), 루이스 (C. S. Lewis)등 위대한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 후 역사에서 과연 기독교가 누렸던 위상을 가질 수 있었으며 심지어 믿음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었을까?
거대한 세속 문화의 흐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날마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노력하고,
달마다 할 수 있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땅히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널리 배우고, 뜻을 확고하게 하며,
모르는 것은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면
진리는 그곳에 있다.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일지기소무, 월무망기소능, 가위호학야이의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 論語 子張 논어 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