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여 희롱
40년 역사 정문도 내놨다…이부진의 국가대표 한옥호텔 집념
- 중앙일보 11월 5일
지난 수요일에 중앙일보에 올라왔던 기사의 머릿글이다
부제는
신라 호텔을 가려면 장충체육관을 왼쪽에 두고 올라가야 하는데 정문이 한옥문이다.
원래는 경희궁의 정문인 興化門 흥화문이 있던 자리에 비슷하게 지어 놓은것이고.
흥화문은 1988년 원래 자리인 경희궁에 옮겨졌다.
이제는 장충단비만 무심히 남아 있는 신라호텔~장충체육관 일대는 원래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고종이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던 곳이다.
*어영청은 지금으로 말하면 수방사로 왕의 친위부대.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이경호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고, 다음해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으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고, 이듬해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고 추도회 추진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
경술국치 후인 1919년에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어 창경궁과 유사하게 위락시설로 바뀌었다.
일본은 공원에 상하이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1932년 인근에 세웠다.
伊藤博文 이등박문을 기리는 절, 博文寺 박문사.
해방 후 일본 군인들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이 터에 국빈접대한다는 명분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영빈관 건립을 건립하게 된다.
이것이 신라 호텔 영빈관의 전신쯤 되는것이다.
이제는 결혼식, 돌, 회갑연등의 연회의 성지가 되었다.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
1972년 박정희 전통은 이병철을 만나 운영비 고갈을 떠넘기며 영빈관은 이제 삼성으로 넘어가게 된다.
신라라는 이름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취지에서 이 전 회장이 직접 지은 것.
나중에 이 회장은 찬란한 우리 고유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시대의 우아한 품위와 향기를 재현시켜보고자 호텔신라를 건설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호텔 경영에는 지식이 없었고 자본이 없어 일본에서 기술과 차관 도입하지만 공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딛친다.
1973년 배럴당 3달러 수준에 머물던 국제유가가 11달러로 치솟았던 1차 오일쇼크.
1974년에는 박정희 전대통령 부인 육영수씨가 피격돼 숨지면서 이듬해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1976년 11월 다시 공사에 들어가는등 우여곡절 끝에 신라호텔은 1979년 문을 열게 되었다.
신라호텔 영빈관은 장충단 奬忠壇이 있던 슬픈 곳이다.
비석의 앞면에 새긴 奬忠壇(:충을 권장하는 제단)이라는 세 글씨는 순종황제가 썼다.
당시 육군대장 민영환이 비석의 뒷면에 내력과 의미를 새겼고.
박정희 전통이 이병철 전회장에 팔아먹은 땅의 끝자락 일부를 서울시에 돌려주고 신라호텔은 건폐율(대지면적 중 건물면적)을 30→40%로 상향하는 조건과 맞바꿔 한옥호텔을 짓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