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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un 06. 2020

일반인문 CXL 망종과 현충일

;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망종3芒種 | 명사. 2. 이십사절기의 하나.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에 들며, 이맘때가 되면 보리는 익어 먹게 되고 모를 심게 된다. 6월 6일 무렵이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24절기 중 아홉번째로 소만과 하지 사이에 있고 양력으로 6월 5, 6일 정도 됩니다.

망종에는 씨를 뿌리기 좋은 시기라는 뜻으로 모내기와 보리베기가 이뤄집니다. 

보리 수확기는 이삭이 나온 후 35일이 지난 망종(6월 5일경) 무렵이 최적기이기 때문에 망종을 농가에서는 ‘보리망종’이라 부릅니다.

그래서인지 ‘망종’의 첫번째 뜻은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이라고 올려져 있습니다.


망종3芒種 | 명사. 1. 벼나 보리 따위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까끄라기 | 명사. 벼, 보리 따위의 낟알 껍질에 붙은 깔끄러운 수염. 또는 그 동강이. ≒망각.


한자도 까끄라기 ‘망芒’에 씨 ‘종種’을 사용해, 곡식(芒)의 종자(種)를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 되겠죠.

그래서 망종은 보리를 수확하고 논에 모를 옮겨 심는 모내기를 하는 절기로 알고 있는것입니다.

속담도 비슷한 뜻의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


또 할일이 두배가 되니 바쁜 시기라는 뜻의 ‘망종엔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도 있습니다.

망종은 매실 수확의 최적기이기도 합니다. 


5월부터 매실이 열리지만 망종 이후에 거둬야 품질이 가장 좋습니다. 

푸릇한 매실이 망종 즈음에는 잘 익은 노란 황매실로 바뀌어 구연산 함량이 가장 높아지기 때문이죠. 

이때 담근 매실 진액은 한여름 시원한 매실주스로 마시면 좋고 매실장아찌, 매실주도 이때 담가야 맛이 살아납니다.

올해는 4월 윤달이라, 단오가 뒤로 밀려 있는데, 보통 망종부근입니다.

그래, 단오에는 좋은 품질의 매실을 거두고 이를 짚불 연기에 쬐어말린 ‘오매’를 사용해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 등을 곱게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먹는, 조선시대 임금의 여름 음료인 ‘제호탕’을 만들었습니다.

뜨거운 여름볕에 먹은 더위를 다스리기 좋은 음료입니다.


오매1 烏梅 | 명사. 한의. 덜 익은 푸른 매실을 짚불 연기에 쬐어 말린 것. 오래된 기침, 소갈(消渴), 설사에 쓰며 회충을 없애는 데도 쓴다.

제호탕 醍醐湯 | 명사. 한의. 오매(烏梅), 사인(沙仁), 백단향, 초과(草果)를 가루로 만들어 꿀에 재어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청량제.

망종은 5일보다 6일이 많습니다.

6일은 현충일이죠.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기위한 추념일입니다.


현충일 顯忠日 | 명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숨진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한 날. 6월 6일이다.


그런데, ‘현충일도 망종의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망종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1956년 6·25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현충일을 제정할 당시 망종이 6월 6일이었고 이를 계기로 현충일이 6월 6일로 정해졌다는 이야기인데, 잘못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 근거로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 당시 거란과의 전쟁’을 들고 있습니다.

당시 거란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사망한 뒤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냈던 것이 망종일이었고, 이후 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이 시기에 주로 했으며 해방 이후 기념일에 포함되었다는 내용이죠.

하지만 세시기를 조사해 보아도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를 6월 6일에 행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전사자를 포함한 無祀鬼神(무사귀신: 자손이 모두 죽어 제사를 지내 줄 사람이 없는 귀신)을 모셨다고 하는 '여제癘祭’의 ‘제일祭日’은 청명, 7월 15일, 10월 1일이었습니다. 


여제3 厲祭 | 명사. 나라에 역질이 돌 때에 여귀에게 지내던 제사. 봄철에는 청명에, 가을철에는 7월 보름에,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지냈다.


그렇다면 왜 6월6일이었을까요?

1회 현충일은 해방후 11년이 지난 1956년이었습니다.

해방 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한 날은 11월 17일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을 보면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기념식전(典)' 행사가 열린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 시절인 1939년부터 1905년 이날이 을사조약 체결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사실상 일본 식민지가 된 날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날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미 있는 추념일을 외면하고 현충일을 따로 만든 겁니다.

국무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이 있었던 달인 6월,  6일을 공휴일로 하여 '현충의 날'로 제정, 거족적으로 국토수호에 바친 고인들의 거룩한 영혼을 추모키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래, ‘6월 6일 영등포에 있는 '군국묘지'에서 '제5회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을 집행하기로 되었다 한다’고 당시 동아일보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1955년에는 제4회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은 4월 23일에, 1953년 10월 16일에, 1952년에는 9월 28일, 1951년에는 4월 7일에 합동 추도식을 진행했습니다.

1946년 11월19일 동아일보 순국선열기념절식전 기사

적어도 한국전쟁 이후에는 확실히 '망종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제사를 지내는 풍습' 같은 걸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풍습이 떠올라서 '망종을 현충일로 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까요?

우선, 국가기록원의 내용을 볼까요.


1956년 4월 19일에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여 공휴일로 정하고, 그 해 6월 6일에 최초로 현충일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현충일을 특별히 6월 6일로 제정한 이유로, ‘6월은 6·25 사변일이 들어있는 달이고, 매년 6월 6일 경에 24절기 중의 하나인 제사를 지내는 망종이 들게 되며, 1956년도에 6월 6일이 망종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현충기념일’은 1975년 1월 27일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일부개정 될 때 ‘현충일’로 변경되었고, ‘현충일’은 1982년 5월 15일에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10824호)"에 포함되어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지면에 현충일이 망종과 비슷한 날짜가 된 이유를 소개하는 내용이 처음 등장한 건 1998년 5월 28일자 한겨레 독자칼럼 '보훈의 달을 통일기원의 달로'였습니다.


호국영령의 위훈을 추모하는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것은 정부수립 이후 가장 큰 국난인 6·25 전쟁을 상기하고, 청명(4월5일)에 사초, 한식(4월6일)에 성모에 이어 망종(6월6일)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에 맞춘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는 당시 서울지방보훈청에 근무하던 김익현 씨였습니다. 

현충일을 제정하고 나서 42년이 지나도록 왜 어떤 신문 기자도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고 이 이야기를 하필 보훈청 근무자가 처음 소개하게 된것이죠.


결국 ‘왜’는 찾지 못하지만 확실한것은 망종과 현충일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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