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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an 24. 2021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I 너븐숭이

; 현대사의 생인손, 4.3 -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년 만에 고향인 제주 서촌마을을 방문한다.

7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까지 일본으로 떠난 뒤 지금까지 오지 않아 고아로 지내다시피 한 내게 제주도는 상처만이 남은 곳이다.

제사를 지내고 난 뒤 몇 달 동안 집안일을 도와준 먼 친척 아주머니,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보이지 않아 잦은 환청과 불안증세(삼촌의 증세가 파출소 사건 이후로 생긴 걸로 생각)로 인해 사회생활이 어려웠던터라 길수 형에게 물었더니 며칠 전 순이 삼촌이 옴팡밭에서 음독자살을 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순이삼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30여 년 전의 참혹한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순이삼촌의 파출소 기피증은 30여 년 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상……

30년 전인 음력 섣달 여드렛날, 갑자기 군경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그 뒤 안내방송을 듣고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군경들이 전부 친척 중에 군인이 있는 가족들은 나오라 명한 뒤 가족이 없는 이들을 전부 교문 밖의 공터로 끌고 가 마구잡이로 총살했다.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는 순이 삼촌 뿐이었으며 그녀 역시 뱃속의 딸을 제외하고 그 총격에서 남편과 쌍둥이 남매를 잃는 참변을 겪었다.

순이삼촌은 그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꿩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그 죽음은 이미 30년 동안 해를 묵힌 운명이었고 삼촌은 이미 그 때 숨졌던 인물이며 그 상처가 30년의 기나긴 시간을 보낸 뒤 비로소 가슴 한복판을 꿰뚫어 당신을 죽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수 형은 이 사단은 국가 전체에서 조사하고 배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고 고모부는 그냥 덮어두자고 하여 잠시 심한 언쟁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후 농사일이야기가 이어진다…

-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간추림


순이삼촌


도서 순이삼촌과 순이삼촌비 일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제주의 4,3 사건을 말하려 하면 으레 “속솜허라”(속마음을 꺼내선 안 된다는 제주말)하며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 금기였던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사대부고에 출근한 현기영은 수업 중 중부경찰서로 연행, 며칠 뒤 합동수사본부 요원에게 인계돼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2박3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첫날은 몽둥이로 전신을 난타 당하고 이튿날은 그 멍들고 부은 몸뚱이 위 군복을 벗기고서 내복 위로 싸릿대 가지를 후려치면서 내 몸 마디마디를 자근자근 후려갈겼다고 합니다.

싸릿대로 손등을 맞기도 했는데 손톱이 터져 끈끈한 피가 엉겨 붙기도 했습니다.

셋째 날은 어느 방에 불려가 다수의 수사요원들로부터 무지막지한 구둣발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다 할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한 채 다시 남부경찰서로 인계된 현기영은 집시법 위반죄로 20일간 유치장에서 머문 뒤 풀려납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현기영은 또다시 학교 수업 중 경찰서의 대공과로 연행돼 갔습니다.

4박5일에 걸친 수사관들의 집요한 신문 공세는 계속되고 순이 삼촌은 판매금지 됩니다.

당시 금서는 600여 종으로 금서에 오르면 곧 베스트셀러 오르는 것이죠.

1990년 해금되자 <순이 삼촌>은 60만 권 팔려 나갑니다. 

펜의 힘!

오페라 순이삼촌
오페라 순이삼촌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리 학살 사건은 1949년 1월17일(음력 12월19일) 새벽, 북촌마을 어귀 너븐숭이 비탈에서 무장대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함덕마을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마다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운동장과 주변 밭에서 300여명이 넘는 주민을 집단학살입니다.

북촌의 너븐숭이에는 당시 학살당한 무고한 주민들의 넋을 기리는 너븐숭이 기념관이 지난 2009년3월31일에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4.3유적지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국비 15억7900만원을 들여 총 부지 2532㎡, 건물 294㎡에 위령비, 문학기념비, 방사탑과 함께 개관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의 피와 살과 뼈가 묻혀있는 곳.


‘너븐숭이’란 제주어로 ‘넓은 가슴’이라는 의미로, 사람의 흉곽을 닮은 현무암 지대의 모습에서 이름 지어졌습니다. 

기념관 내부의 전시관을 관람하면 4·3의 원인과 경과 등에 대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화분 하나에 둘러선 세 개의 액자가 입장객을 맞아줍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4·3을 해결하기 위해 취한 공식적인 조치들을 담은 사진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분향하는 사진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1998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좌파정권 등장.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 


2003년 진상규명위는 4.3사건 55년 만에 정부차원의 <진상보고서> 채택.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 인명 피해는 3만여 명으로 추정.


2003년 3월까지 정부에 4.3 관련자로 접수된 사람은 1만 4천 28명 이며 이중 2천 778명을 처음으로 4.3 희생자로 지정하고 같은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 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 공식 사과합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눈물바다.

보수우익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것은 위헌이라며 2004년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소송>제기하지만 당연히 각하됩니다.

이 친구들이 보기에 4.3평화공원은 폭도공원이겠죠.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제주 출신인 강요배의 죽은 여인과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의 그림과 시 한편입니다.

강요배 젖먹이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이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 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전시실에는 ‘순이삼촌’의 초판본을 비롯해 현 작가가 소설 집필을 위한 취재 때 사용한 녹음기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내부 전시 공간 ‘너븐숭이의 기억’에는 당시 희생된 443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걸려있습니다. 

희생자의 나이 2세, 3세... 유독 어린 아이들의 희생이 많았습니다. 

전시관에는 1947년 8월 13일 삐라 사건을 시작으로 1949년 1월 17일에 자행된 북촌리 주민 대학살과 그 날 희생된 주민들을 위해 묵념을 했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1954년의 “아이고 사건”까지 믿기지 않는 역사를 소개합니다.

4·3 위령비에도 희생된 북촌의 이름들이 커다란 비에 빼곡히 쓰여 있습니다. 

‘이근평녀(女)’, ‘홍영삼자(子)’처럼 누군가의 딸과 아들일 뿐, 이름이 채 적히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온가족이 희생되어 이름이 확인되지 못한 사람들이죠.

이름 몇 번 불려보지도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들의 수도 많습니다. 


기념관 입구에는 ‘애기무덤’이라 불리는 20기의 작은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4·3 이전에도 아이들의 무덤으로 이용되던 곳인데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아이들의 묘라 합니다. 

옆으로 누군가 공들여 쌓은 돌탑과 사탕, 장난감, 양말 등이 보이는데 기념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두고 간 선물입니다. 

한라 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마을

4.3 사태의 군인 한 두 명 다쳤다고 

마을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 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조차 뺏아 갔을까

돌무덤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 양영길님의 애기 돌무덤 앞에서


애기무덤 옆으로 조금 내려오면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에서 ‘순이삼촌비’와 방사탑을 마주한다. 

비석들은 바닥에 겹겹이 쌓여있거나 나뒹굴고 있는데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을 상징합니다.

순이삼촌비와 다시는 제주 4.3과 같은 액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방사탑에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주검의 토양분이 되어 지슬도 그외 여러 밭작물도 그후로 몇년간 다른 밭보다 더 실하게 내놓았다는 밭, 그 밭에서 난 것들은 되려 꺼릴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의 아픔, 밭을 일굴 때마다 총알이나 유골을 발견하던 순이삼촌, 그이가 그 옴팡밭에서 어떤 마음과 심정이었을지 그리고 왜 그 밭에 가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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