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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9.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정여창고택

넷. 밀양을 중심으로 좌 안동 우 함양,  함양 정여창고택과 남계서원

이제 사림의 두번째고을  함양이야기다.


정여창고택과 남계서원

鄭汝昌정여창.

호 一蠹일두.

보잘 것 없는 좀이 오랜 시간을 두고 나무를 갉아대듯이 오랜 시간을 두고 학문을 하겠다는 의미.

일두는 ‘동방의 오현’ 중국의 동쪽 조선의 별들인것이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정여창 이렇게 다섯분.

일두의 초명은 백욱.

나이 8세 된 백욱은 부친이 의주로 부임하게 되어 따라 갔다.

집에 장영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찾아왔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는 다른 데가 많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빠짐없이 꽉 차 있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오.

이름은 여창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창이라는 이름에는 장차 집안이 번창하고 길이 영화를 누린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랑채 현판은 忠孝節義 충효절의.

충성, 효도, 절개, 의리. 소진자고를 사표로 삼는다.

춘추전국시대, 소진은 학문을 하면서 졸음이 올 때면 잠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찔러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는 여섯 나라의 정승이 된 인물이다.


산들바람에 부들 풀은 하늘하늘 4월 화개 땅에 보리가 벌써 익었네.

지리산 천만 굽이를 다 보고 나서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으로 내려간다.

- 일두 


18세 되던 해에 이시애의 난 평정하다 부친 전사하고 일두가 직접 전쟁터로 나가 한 달 만에 시신 수습한다.

조정에서는 부친의 공적을 기려 일두에게 벼슬 하사받게 되지만 특혜는 싫다고 본인이 거부 한다.

1456년 과거에 낙방한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짓는다.

항우가 초나라의 회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조롱한 이 한편의 시는 후에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오게 된다.

145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김종직은 고향에 서당을 열고 영남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등이 제자로 수학하게 된다.

그래서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시조로 등극한 것이다.


좌 안동 우 함양.


그만큼 선비들의 성지가 된것.

1480년 성균관 입학하여 과거 준비 중 모친상으로 낙향하여 3년 시묘한다.

상복을 벗은 일두는 지리산 밑 악양동에 들어가 岳陽亭(악양정:따뜻한 큰 산 위의 집) 짓고 후학들 가르치기  시작한다.

1901년 후학들은 악양정 중건하고 일두를 기리게 된다.  

1490년 드디어 41살에 과거 급제하여 성종은 특별히 일두를 왕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설서로 임명하나, 왕세자인 연산군은 천방지축이다.

1492년 스승도 가시고.

1494년 고향인 안의현감으로 내려간다.

1498년 조선 4대사화의 첫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훈구파의 일방적인 공격이지만, 주로 쿠데타로 부와 권력을 독식한 훈구파와 과거시험을 통해 등장한 사림파의 영원한 전쟁이 시작된 거다.  

1498년 35살의 김일손은 팔팔한 혈기로 스승이 지은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옮겨 적는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당하고 김종직은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에 처해진다.

정여창은 불고지죄로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간다.  

대한민국 최북단 함경도 종성 도착하고 7년 만에 유배지에서 병사한다.

후손은 시신을 함양에 모시게 된다.

이어서 연산군의 생모 윤 씨를 폐위시키고 사사한 세력에 대한 복수전으로 일두 가고 다음 달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김굉필 사형.

이미 죽은 정여창 부관참시.  


공부를 업으로 삼았어도 하늘의 기미 몰랐거늘

소학 공부 해보니 이제까지의 잘못 깨닫고

지금부터 정성껏 자식도리 다하련다.

구차하게 어찌 잘 사는 것 부러워하랴.

- 김굉필


역풍이 거세다.

1506년 중종반정.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 가서 학질로 그해에 죽는다.

1517년 중종은 억울하게 부관참시를 당한 일두에게 문인 최고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우의정 추증하게되고.

1552년 후학들은 남계서원 건립하고 일두를 모신다.

1566년 명종은 사액을 내려 일두를 기려 소수서원에 이은 두 번째 사액서원이 된다.

1610년 문묘 배향.

1604년 정여창의 후손 정덕대는 일두 서거 1백주년을 맞아 3천 평의 대지에 일두 고택 건립한다.  

직각삼각형을 이용해 직각을 구하고,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비율을 이용한다는 句股弦法 구고현법 을 이용한 배치를 한다.

 ‘구’란 짧은 변, ‘고’란 긴 변을 가리키고 '현'이란 물론 빗변을 이야기 한다.

3:4:5가 명품 비율이라는 것.

文獻世家 문헌세가.

여러 대에 걸쳐 모범이 되는 선비의 집.

중요민속자료 제186호.  

선생의 16대 며느리 박흥선은 전통식품명인 27호.

500년째 내려오는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의 명인이라는 것.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남측이 내놓은 공식 만찬주 가운데 하나였다.

일두의 고향은 개평마을이다.

마을 생김새가 대나무 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자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

103가구 198명이 살고 있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배출한 대학교수만 150여명.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집성촌이다.

일두고택 18대 종손은 은행장 퇴임하고 일두고택 앞에 새로운 한옥 짓고 안빈낙도 중이다.

근처 오담고택의 종손도 18대손으로 일두고택 종손과 같은 항렬이신 이분도 홀로 고택을 지키신다.

요새 고택은 홀아비가 점령 중...  

일두고택 대지는 처음 6천평이었지만 지금은 3천평. 여기 평당 대지 30만원이고 벼슬에 관심이 없는 집안이라 대한민국에서 출세한 일두선생 후손은 없다.


위치는 88고속도로 함양IC에서 지곡면 방향으로 15분거리에 있다.

남계서원은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고택에서 5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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