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문 XVIII 정치의 뿌리

왜 변화 할 수 없는지…역사 거꾸로 읽어보기

by Architect Y

뒤집어보는 정치의 뿌리

: 왜 변화 할 수 없는지…거꾸로 되집으며 변화할 수 없는 그 뿌리를 알아본다


권문세족-신진사대부(훈구)-사림-동인-남인-서인-노론-친일파-군사정권-군사정권연장선

*번호는 굵직한 변화를 중심으로 임의로 정한것임

#정치의뿌리 #박근혜정부 #정치의연장


1. 현재의 박근혜정부는 MB의 권력이양으로 자연스레 승계되었는데 그럼 단절되었던 계보의 부활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사적인 정통성에 의해 그 뿌리는 계속 유지하며 이어온 것이다.

10년의 권력 변화는 그 맥을 결코 끊을 수 없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번의 연임이 가능한 미국의 경우 깊이 뿌리 박지 못하게 의도하건 아니건 두번씩(물론 재임중 큰 문제가 없다는 전제)당을 바꾼다.

우리나라는 DJ에 이어 노통 10년이 전부라는것이다.

이제 위로 올라가 본다.

YS는 알아서 군부의 연장선으로 봐야 할꺼고 그 위로 노태우대통령, 전두환대통령으로 이어지는데, 현대사의 계보는 대부분 알다시피 그 뿌리가 군부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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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 막강한 군부의 시작인 제 3공화국의 수반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다.

그 박통은 만주국의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활약했고, 당연히 주요 각료 상당수가 친일파.

1962년 시행된 문교부 독립유공운동자 공적조사위원회의 공훈심사위원 중에도 친일파가 포함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심사.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해 우리 역사를 사대성 식민지성이라고 난도질했던 친일 학자들이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심사했다.

1년 남짓 군부가 아닌 윤보선대통령이 이끄는 제2공화국.

뭐 여기도 별 다를건 없다. 각료 13명 중 7명이 친일파여서 친일 각료 비율은 53.8%.

결국 해방 후 듯세한 친일파는 친일세력 국내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과 결탁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했던것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강제해산을 친일파들은 자신들에 대한 면죄부로 이용했고.

1949년 6월6일 친일경찰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당해 강제해산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산됨에따라 우리사회는 친일파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법적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다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거다. 제1공화국의 연인원 96명의 각료 중 34.4%에 달하는 33명이 친일파.

결국 지금의 정권의 근대로의 뿌리는 친일파에서 흘러 나와 그 사상이 같은 맥락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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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더 위로 가본다.

일제시대의 노론이 친일파로 이어진거다.

인조반정부터 300여 년, 1당체제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부터 150여년을 집권한 노론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 점령 직후 1910년 10월 후작(侯爵) 6명, 백작(伯爵) 3명, 자작(子爵) 22명, 남작(男爵) 45명 등 총 76명에 달하는 인물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 대부분 이씨, 민씨(민비의 일족)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 된다.

반면 양반 사대부들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쪽은 야당이었던 소론과 재야 남인들이고.

신흥무관학교(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주축)는 소론의 대표적 집안인 우당(右黨) 이회영(李會榮) 가문에 의해 새워진 거다.

노론이 일제 치하에서도 부귀영화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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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대문을 낮추고 남대문을 높이겠다고 천명한다.

다시 말해서 노론을 약화다른당파 등용하겠다는것.

익종비(翼宗妃) 조대비와 결탁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철종의 후사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환곡을 사창제로.

호포법(戶布法:조세 평등).

전국 600여 서원 중 47개사액서원제외 철폐.

집권 10년(1873)만에 유생 세력 대표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실각한다.

대원군의 실각이 개방으로 이어지자 당황한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을 일으켜 이에 저항했으나 이미 늦었다.

역시 노론이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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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도정치勢道政治시대의 도래.

정조의 죽음=왕조의 마지막 버팀목 몰락으로 이어진다. 어린 순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수렴청정을 한다.

천주교를 사냥하게 된다. 즉 신유(辛酉) 대박해로 남인 신서파 제거된다.

정순왕후 김씨사망,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 부친 김조순이 권력을 장악하게되면서 안김(安金 :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 된다.

순조 11년(1811)의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13년(1862) 임술민란등 민란이 끊임없다.

노론의 강력한 통치.


6. 정조正祖.

사도세자 사후 노론 시파(時派-사도세자죽음 동정)와 벽파(僻派)로 분파된다.

시파의 지지로 정조 겨우 즉위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 있는 노론 일부 인사들을 처벌한다

→ 노론 홍계희가 사사(死士)를 고용하여 정조 암살 시도한다.

규장각(奎章閣-노론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양성목적)을 설립하고,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다.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임명하지만 정계 소외 100여년의 남인은 노론의 상대가 안된다.

노론이 정조와 남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이용한것이 서학(西學: 천주학-이가환·이승훈·정약용 등 신서파(信西派) 대부분이 남인)이다.

노론 벽파는 공서파(攻西派)를 형성하고 정약용 등 귀양보낸다.

정조 재위 24년(1800) 사망하여 노론 벽파는 천주교 이용하여 대대적대 남인 공세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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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택군擇君.

숙종과 노론은 장희빈마저 사형시킨다. 노론은 장희빈 아들 세자(경종)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문제 야기시킨다.

그러나 소론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고.

노론의 경종 무력화정치 입안[1단계 연잉군(영조) 왕세자 책봉, 2단계 연잉군 대리청정으로 경종을 무력화]한다.

정상적인 왕조국에서는 사형감이다.

1단계 실행후 2단계 소론에 의해 저지당한다.

임인옥사(壬寅獄事).

경종 2년(1772) 노론 4대신이 ‘사흉’(四凶)으로 몰려 사형당한다.

경종 재위 4년 2개월만에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사망에 이른다.

이인좌의 난-소론은 연잉군(영조)과 노론의 독살로 믿었다.

영조와 소론 온건파의 연합으로 진압한다.

탕평책 시행.

자신을 즉위시켜준 노론을 중시한다.

나주벽서 사건[영조 31년(1755) 나주 객사(客舍)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벽서]으로 탕평책을 붕괴되고 과거사에 대한 영조와 노론의 이런 집착은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사건 발생시킴으로 노론 1당독재가 된거다.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군사정권연장선-군사정권-친일파-노론…이렇게 한 뿌리로 이어 온거다.

이제 더 위로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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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육 시대. (1당독재)

남인의 득세후 경신환국(庚申換局)[숙종 6년(1670) 남인 영의정 허 적의 연시연(延諡宴) 사건]으로 서인이 장악한다.

허견許堅 옥사(獄事), 허새許璽 옥사 등 사건 조작으로 피바람이 분다.

젊은 서인들의 정치공작자들의 처벌 요구로, 숙종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등 산림의 세 유현(儒賢)등용한다.

윤증의 3대 명분론(남인들과 화해, 외척 정치 간여 금지, 상대당 등용)이 실현 불가능하여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한다.

→ 노론, 소론(남인과의 화해 주장)으로 분당.

기사환국(己巳換局) 장희빈은 숙종 14년(1688) 10월 왕자생산하고 원자 정호 종묘에 고묘(告廟)반대한 서인이 축출당하고 남인이 득세한다. 5년 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정치 보복으로 완전하게 남인이 몰락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의 정쟁 시작된다.

09 남인.jpg 송시열


9. 숭무주의崇武主義 효종.

송시열과 기해독대(己行對) 한달 후 돌연 사망하여 북벌이 무산된다.

예송논쟁[1차- 효종의 국상(國喪)때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서인1년 남인3년, 2차-효종비 인선왕후 장씨의 국상때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서인8월 남인1년]에서 1차 서인, 2차 남인 승리로 숙종때 살육전이 벌어진다.


10. 인조반정과 예론.

서인과 선조는 서손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추대하고 광해군은 북인을 축출한다.

반발 무마로 남인(이원익李元翼 영의정) 등용으로 서남 연합수립[관제 야당에 불과]한다.

서인의 향명대의向明大義 주창한다

→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을 야기한다.

폐쇄주의자 서인에 의한 개방적 소현세자 암살하고.


11. 임진왜란은 사대부 지배 체제가 종말을 고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사림파 내부에 현안 해결의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다.

선조의 이궁으로 백성이 분노[형조(법), 장예원(노비관리) 방화-지배 체제 자체를 방화]하고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 3남 순화군(順和君)을 지방으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한다.

백성은 왕자들을 체포하여 왜군에게 인계할 정도로 조정을 불신한다.

재야 유학자들(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조종도趙宗道,·김덕령金德齡등-북인. 율곡과 퇴계가 이기이원론 논쟁을 공리공론으로 치부, 지리산에서 농사 지은 칼 찬 선비)은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이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한다.

경기도에 대동법,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는 등 현실문제주력한다.

명(明)과 후금(靑)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실시하여 → 서인등이 반발한다.결국 서인의 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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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림파의 득세.

균전법(均田法), 한전법(限田法)뭍힘으로 농민을 배신하게 된다.

선조 7년(1574):이조전랑(吏曹銓郞)에 천거된 김효원(金孝元)의 적격성 여부 쟁론하여 당쟁의 시발된다.

동인과 반대 서인 분당하게 되는 등 내부의 권력을 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림파 영수 이 이(李珥) 경장기(更張期:개혁기)로 인식하여 분당을 반대한 이 이의 조제론(調劑論)을 동인이 배척 서인이되어간다.


13. 훈구파의 막강한 권력(국왕 통제불가)

→ 사림파의 등장[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 행사-농민 지지]

사림파-신분제 완화, 훈구파의 경제적 침탈 보호. 종주宗主 김종직

연산군의 정치적 식견 부족하여 훈구파는 상황을 이용한다.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이용 무오사화(戊午士禍)일으키고 여기에 10년(1504)의 갑자사화, 중종 때의 기묘사화(김종직 등이 화를 입음), 명종 때의 을사사화(윤임 등이 화를 당함) 4대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정계에서 축출하지만 사림파의 재기가능 이유는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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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계유정난(세조의 군사쿠테타) 주도세력 43명 정난(靖難)공신 책봉하고 예종의 조기사망(1년2월)으로 적자 월산대군이 아닌 자을산군(성종-장인한명회) 즉위하며 75명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이 책봉되어 훈구파勳舊派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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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려말

권문세족[문벌귀족, 무신세력,친원배(親元輩)] VS 신흥 사대부[공·사전적철폐-농민지지]


자…

이제 위로부터 완전히 정리 하자면…

조선의 건국과 정치적 안정기까지 주도 했던 진취적이고 진보 성향의 신흥사대부와 훈구파는 안주와 보수 성향의 사림으로 대체되고 안주와 보수 성향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 더욱 강력하게 발전을 한다.

그래서 사림-동인-남인-서인-노론-친일파-군사정권-군사정권연장선로 이어지며 현 정권에 이른다.

결국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한 중요한 정책은 온건 보수의 정치 성향에 대민에 관하여는 강력한 압박을 이어온 지배층이 1500년 이후 500년이 넘계 그 명맥을 서슬 퍼렇게 이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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