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II 조선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 광해 01

by Architect Y

강력한 절대왕권과 실리외교, 탕평을 꿈꾸던 최고의 군주


흐릿한 역사속 인물, 광해.

노산군에서 200년 뒤 숙종에의해 복권된 단종을 빼고 조선조에서 묘호가 군으로 강등된 임금은 연산과 광해 둘.

연산군.jpg
광해군일지.jpg

30년을 살며 10년을 왕으로 살다 폐위된지 두달만에 생을 마감한 연산과 비교되는 광해는 33살에 보위에 올라 48세에 폐위되고 보위기간보다 긴 시간을 강화등지에서 유배하다 제주의 위리안치에서 숨을 거둔 예순 일곱의 슬픈 삶을 살다 간 개혁군주였다.

그의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일으킨 인조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또한 인재 기용에도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고 宣惠廳선혜청(대동미,대동포,대동전,의 출납을 관장한 관청)을 두어 경기도에 大同法대동법(防納방납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을 실시하고, 1611년 量田양전(실제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측량 제도)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다.

또한 왕권강화를 위해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慶德宮 경덕궁(: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외교면에서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고 일과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 했고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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