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돌아봐야할 역사교육의 확증편향오류 신숙주
; 숙주나물이라는 내용으로 신숙주 폄훼를 다시 읽다.
편파적인 내용은 위험하다.
인문의 기본은 확신이 아니라 모든 사실에대한 의심이다.
지금의 역사가 바로 된건지...
사실이 정말 사실인지 다방면의 기록을 통해 근사치로 접근 해야하고 그것조차 확신한다면 오류가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린 어려서 태양계행서을 9개로 사실처럼 배워왔지만 최근에는 8개로 수정했다.
신숙주는 잘 알다시피 세조의 편에 섬으로써 성삼문과 대척점에 선다.
그는 훌륭한 음운학자였다고 한다.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곱지 않다.
형장에 끌려가는 순간까지 당당하였던 성삼문을 참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내가 그 당시 선비라면 세조와 단종의 싸움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이건 단종이건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
10살도 안 되는 소년 왕을 위해 절개를 지키는 것이 대의일까.
민중의 편에 섬이 대의가 아닐까.
이런 논의는 판단에 어려움이 따른다.
결론은 유보한다.
조금 더 가보면
세조에게 대들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성삼문.
조선 성균관 학사들이 상투를 자르고 따르며 저자거리의 백성들이 연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할 때에 대역죄인이라 하지만 충신 열사인 것을 신숙주의 아내 죄수를 실은 수레에 타고 있을 남편을 기다리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성삼문은 절명시를 소리 높여 외면서 황천으로 갔다 하니
승리자 세조 편에 붙어 버린 신숙주는 역적이로다.
미천한 년이 신숙주에게 시집 와서 신씨 가문을 망치었도다 하면서 목을 매고 자결하였소이다.
이렇게 신숙주 아내 자결설은 설왕설래가 있으나 남효온이 쓴 <육신전>에 써진 바있으나 사실은 알수 없다.
마지막으로 신숙주를 존경하는 맘이 생긴 그의 글을 올린다.
그는 남들이 말하는 그 배신의 일 뒤에 꾸준히 노비해방과 관련된 의견을 임금에게 올렸다.
아래 글을 본다면 과연 우리가 배운 공교육의 역사 속 신숙주만을 바라봐야 할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당연 할것 같다.
*국조보감 28권 발췌
… 신의 계책은 전에 이미 발의되었다가 다시 중지되었는데, 지금 와서도 더욱 별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의 말을 쓰신다면 庶孼서얼과 公賤공천ㆍ私賤사천 중에서 武才무재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해서 南道남도와 北道북도에 들어가 방수하게 하되, 북도는 1년, 남도는 2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응모자가 많도록 하는 한편 병조에서 試才시재한 뒤 보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서얼은 벼슬길을 터주고 賤隸천예는 免賤면천하여 良人양인이 되게 하며, 私賤사천, 또는 四賤(사삿사람의 집에서 부리고 또는 賣買매매되었던 종, 婢僕비복ㆍ白丁백정ㆍ巫覡무격ㆍ俳優배우ㆍ娼女창녀 등인데, 奴隸노예의 한 가지로)인 경우에는 반드시 본주인이 병조에 단자를 올린 다음에 試才시재를 허락하여 주인을 배반하는 종이 없게 하고, 그 대신자는 자원에 따라 골라 주게 하소서.
그리고 만약 무재가 없는 경우에는 남ㆍ북도에 곡식을 바치게 하되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그 많고 적은 수를 정하고, 벼슬길을 터주고 양인이 되게 하는 것도 무사(武士)와 똑같이 해주소서.
그러면 군사와 양식이 조금은 방어에 대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표지그림은 조선 초기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던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는 단순 기행문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외교 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후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필수서적이 되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신숙주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교린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
* 夜戰賦詩야전부시: 17~18세기에 만들어진 역사화첩인 北關遺蹟圖帖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되어 있으며, 세조 때, 함경도 도제찰사 신숙주가 여진족을 물리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