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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  유배지 김진구 적거터

유배지 乇羅탁라 그 열번째 장소, 晩求窩金鎭龜 만구와김진구 적거터

만구와 김진구가 제주에 유배되어 적거했던 터.

김진구 적거 터는 제주 동문재래시장 내 위치해 있다.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 형, 고, 호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누이가 인정왕후였기 때문에 늘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사화가 일어나자 유배되어 이곳에서 5년을 적거했다.

그 뒤 아들 북헌, 춘택도 유배되어 한때 이 곳에 적거하였으며 손자 덕재도 대정에 유배되는 등 3대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김진구 [金鎭龜, 1651~1704]

본관 광산. 자 수보(守甫). 호 만구와(晩求窩). 시호 경헌(景獻).

김지구는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으로 돈령부영사 만기(萬基)의 아들로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어 《현종실록》 수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어 정언(正言) ·헌납 ·교리 ·응교(應敎) ·집의(執義) 등을 거쳐 당상관에 올라 좌승지 ·수원부윤 등을 지내고, 1684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장악하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한 관계로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가혹한 수법으로 남인을 숙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처음 유배소는 주성 안의 가락천 냇가였다.

귀양살이 5년동안 제주의 자제와 유생들에게 새로운 학풍을 열심히 가르쳐 제주 인재들을 문과에 급제시졌다.

1694년 장희빈이 서인 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이 해 4월에 해배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서인(西人)에게로 넘어가자 호조참판에 기용된 뒤 도승지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696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세자가례부사(世子嘉禮副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169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 형조 ·공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 1700년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우참찬(右參贊) ·좌참찬을 거쳐, 1702년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김진구의 아들 북헌 김춘택도 1706(숙종 32) 8월 노론 소론의 대립과 분열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제주에 유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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