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역사 속 명화 이야기
미술관, 박물관 디자인을 하면서 관장, 학예사, 작가, 그리고 평론가들까지 많은 분들을 알아가며 구술로 전해 듣는 다양한 뒷 이야기들도 많았습니다.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 한 점이 천문학적 액수로 거래되는 현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일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벌어졌던, 어쩌면 그 시작점일지도 모르는 시대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는 책이 지난 3월(202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것은 현대의 상황이 시대의 변화만을 가져왔을뿐, 그 메커니즘에는 다를것이 없었습니다.
1566년 8월 21일 네덜란드 Cathedral of Our Lady, Antwerp 안트베르펜 성당. 난입한 군중이 온갖 성상(聖像)들을 끌어내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우상숭배를 배격한 프로테스탄트 방침에 따라 신자들이 성상 파괴에 나선 것입니다.
대부분의 예술품이 교회나 국왕의 주문으로 만들어질 때라 미술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었으나 불과 한 세기 뒤 네덜란드 미술계는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렘브란트, Johannes Vermeer 페르메이르 등의 거장들이 출현하며 빅뱅을 일으키고 이어 네덜란드 출신의 Vincent van Gogh 고흐와 Pieter Cornelis Mondriaan 몬드리안이 각각 Impressionism 인상주의와 Modern abstraction추상회화를 이끌게 됩니다.
1.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2.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3.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양산했나
4.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5. ‘신의 길드’와 ‘왕의 아카데미’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대
6.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7.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8.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던 시대
여덟개 챕터의 제목을 보면, 14~16세기 이후 600여 년간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와 문화사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회화(명화)에 투영됐고, 세계사 흐름에 무슨 영향을 미쳐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기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스니다.
오늘날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화'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하는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Johannes Vermeer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미술이 가진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건축, 회화, 조각, 인테리어, 보석, 패션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습니다.
오늘날 한 점에 몇 백억 원을 호가하는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한때 잡동사니 취급을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말하면 놀라는 독자가 적지 않을텐데 한때 허접쓰레기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는 어떻게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이 된것은 19세기 프랑스 파리를 주름잡던 천재 미술상 폴 뒤랑뤼엘의 피나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새벽 여명이 비치는 부엌에서 조용히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몸짓이나 표정, 구도에서 삶의 엄숙함 나아가 소명의식이 연상되는 Johannes Vermeer 페이메이르의 The Milkmaid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오늘날 명작으로 인정받는 작품 중 특히 생활감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유럽 회화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런 과감한 시도를 맨 처음 한 나라가 네덜란드였습니다.
당시 페르메이르는 해외의 그림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일 정도로 이미 인기를 얻은 화가였습니다.
그래, 프랑스의 애호가도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직접 보고 구매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지만 정작 페르메이르는 그들에게 보여줄 작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힘든 작품이 근처 빵집에 걸려 있던것은 작가의 어려운 생활과 다불어 그 빵집 사장이 3년치 빵값을 지불한갓을 미루어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 마케팅으로 연결되는 가치를 메기기 시작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등을 남긴 천재화가 다빈치.
그러나 그는 식객이라는 당시 예술가 후원계로 아무리 훌륭한 예술작품을 남겼더라도 그 만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숙식을 해결하는 정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유들로 업적에 비해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투자한 아윌렌부르흐의 공방에서 기거하며 암스테르담에서 본격적으로 화가 활동을 시작하며 이 공방에는 모작 혹은 위조로 돈을 버는 가짜 그림 생산 공장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으로만 생계를 꾸려나가기보다 공방에서 조직적으로 생산한 ‘렘브란트풍’ 작품을 계획적으로 판매하는 편이 경제적 성공과 직결된다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화가 브랜드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 화가임에도 자기 작품을 모작해 아류작을 양산하는 방식의 전략은 명확히 잘못된 선택으로 그는 성공을 위해 선택했던 경영 전략이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식으로 실패하면서 만년에 궁핍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며 경제적 성공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불명예로 끝을 맺습니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미술분야에서 지금의 상태를 만들어낸 두가지를 이야기하며 마무리 합니다.
하나는 대중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인상주의 작품의 가치를 격상시켜 준 사람인 Paul Durand-Ruel폴 뒤랑뤼엘과 ‘대중의 상품 지식 부족’이 19세기 유럽에서 비평가의 가치와 영향력을 극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Paul Durand-Ruel 폴 뒤랑뤼엘은 마네, 드가,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폴 뒤랑뤼엘이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cabriole leg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였습니다.
상주의 그림은 등장 초기에만 해도 전위예술의 일종으로 ‘잡동사니’ 혹은 ‘불량품’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인상주의 특유의 경쾌한 화풍에 둔중한 금테 프레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화가들의 볼멘소리에도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을 팔 때마다 금테 액자를 고집했고 화가의 항의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고객이 보기에 인상주의 그림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상품인지라 가격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덜컥 사들였다가 가격 폭락 사태라도 벌어지면 난감해집니다.
하지만 왕조 양식 액자에 넣은 작품에는 은연중 왕실 화가의 명품과도 같은 품격이 부여되기 때문에 금테 액자는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였던것입니다.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가 확립한 후에야 비로소 고집을 꺾고 화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단순한 디자인 액자에 그림을 넣어 전시했고 이 시기에는 어떤 액자에 넣어도 인상주의 회화는 꼭 사겠다는 고객이 넘쳐날 정도가 되어 내놓기 바쁘게 팔려나가는 인기 상품이 돼 있었기 때문에 금테 액자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이제 신문과 집지의 뒷받침없이는 상공을 할 수 없겠다라는 푸념을 했을정도로 당시 사회는 비평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대대적인 종교 미술 금지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고 프랑스 혁명으로 왕권과 교회권력이 타도되면서 19세기 파리 미술 시장도 17세기 네덜란드와 비슷한 위기에 맞닥뜨리게됩니다.
그럼에도 19세기 프랑스 회화시장이 미술사에 유례가 없던 인상주의 회화라는 초고가 상품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민사회에서 살아가게 된 대중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길 잃은 양 떼처럼 우왕좌왕하며 돈을 주고 뭔가를 사려고 해도 상품 지식이 압도적으로 부족했기에 비평가의 식견에 의지하지 않으면 눈 뜬 상태에서 코 베이는 세상에서 순진하게 쇼핑에 나섰다가 교활한 장사꾼의 봉이 되기 십상인 처지였습니다.
장사의 성패는 상품 지식이 없는 시민 고객을 구매라는 의사 결정으로 이끄는 전략에 달려 있었고 이 시대에 비평가라는 바람잡이, 즉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부추기는 새로운 시대의 직업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습니다.
5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소설, 여섯 편의 희곡과 수많은 콩트를 써낸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Honore de Balzac 오노레 드 발자크는 Monographie de la presse parisienne 기자 생리학에서 “이제 비평은 비평가를 먹여 살릴 뿐이다”라고 탄식했고 출판계의 내막을 폭로한 소설 Illusions perdue 환멸에서는 비평가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주위에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 네트워크, 즉 부수입을 챙기는 구조라고 폭로했습니다.
물론 아픈 곳을 찔려 뜨끔한 당시 각 신문사는 발끈하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발자크 타도를 외쳤고, ‘불경한 작가’에게 괘씸죄를 적용해 원고를 의뢰하지 않는 방식으로 치졸하게 보복하기도 했습니다.
예술은 예술로서 오롯이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라는 전제로 저자는 자본주의와 얽혀 있는 예술을 서술해 나갑니다.
예술은 인간이 창조하고향유하는 문화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함께 움직입니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이 사회는 인간의 욕망이 맞물려 변화 합니다.
예술은 이러한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욕망이 투영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