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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문 CLXXXVII 박영효의 태극기?

; 광복절에 생각해 보는 태극기의 시작

by Architect Y

공교육, 특히 역사관련 내용들은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져 자연스레 오류를 바로잡고 있지만 20세기 말까지도 식민사관에 이어진 역사적 오류를 그대로 공교육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고교시절 배웠던 역사에 의하면 1882년 9월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박영효가 게양한 것이 태극기의 효시라고하며 박영효가 만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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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상징하는 한 나라의 국기를 외교목적의 타국 방문단 중 한명이 급조해 그려(?) 걸었다?

그 당시 국기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1997년 서울시청 공무원 송명호씨는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일간지 ‘時事新報 시사신보’에 실린 박영효 수신사의 기자회견 내용을 찾아내어 박영효가 임의대로 만든것이 아님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제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하며 본국인 청은 황색을 사용하니조선은 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따라 청색바탕을 사용해야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군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2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고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9월) 28일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라고 시작하고 있어 당시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한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일본의 일간신문 「시사신보」는 1882년 10월 2일자의 지면에서 이 태극기를 소개하고 있지만, 태극기를 국기로 한 경위에 대해 「청국문답」과는 다른 내용을 게재해 있습니다.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지나에게 삼각형의 푸른 땅에 용을 썼다. 청지를 용후베시라고 지시함에 국왕은 크게 之을 분개 결코 那那의 국기에 모방에서 빼고 사각형의 옥색지에 태극의 圖(두 巴繪)를 청적으로 써 깃발의 네 모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경을 부과하는 것을 자금 조선의 국기로 정하는 취사가 태어나거나 있어...

...(청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청국의 국기에 따라 삼각형의 청자에 용을 그려야 한다. 청의 국기는 노란색이고 조선은 청의 동방 위치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동쪽을 나타내는 청색을 깃발의 바탕색으로 해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국왕(고종)은 크게 분개하고, 절대로 청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는다고 하며, “옥색지에 두 범의 태극도를 청색·적색으로 그려, 네 구석에 동서남북을 표현하기 쉽다卦을 배치한 깃발을 앞으로는 조선의 국기로 정할 것”이라고 결정됐다.


...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清国の)馬建忠が「朝鮮の国旗は清国の国旗に倣って三角形の青字に龍を描いたものにすべきである。清の国旗は黄色であり、朝鮮は清の東方に位置する国であるため、東を表す青色を旗の地色にすべきである[13]。」と指示した。これに対し国王(高宗)は大いに憤慨し、絶対に清国の国旗を真似ないと言って、「玉色地に二つ巴の太極図を青色・赤色で描き、四隅に東西南北を表す易卦を配置した旗を今後は朝鮮の国旗と定める」と決められた。

-日本の日刊新聞 「時事新報」 1882年10月2日 太極旗を国旗, 清国問答


이러한 사실로 청나라의 강요에 분개한 고종황제가 직접 청색과 적색으로 태극원을 만들고 4괘 도안을 한것이고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그리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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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가 개최한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는 박영효가 아니라, 이보다 앞선 그해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역관인 이응준이라는 주장이 제기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첫 태극기가 게양되었던 것으로 동의하였고 결국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를 기본 삼아 4괘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하였다고 결론지어졌다고 주장입니다.

이응준이 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용된 태극기는 청의 속국임을 상징하는 청룡기 대신 조선이 반청 자주독립국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청은 이 태극기가 일본 국기와 서로 혼동된다는 이유로 청의 국기를 본떠 색깔만 다르게 칠하거나 태극 주변에 팔괘를 그린 국기로 바꾸라고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1882년 조미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 제독은 조선이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와 비슷한 국기를 게양한다면 조선을 주권독립국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조선의 접견대신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명했고, 이응준은 5월 14-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 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이 ‘이응준 태극기’가 5월 22일의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함께 나란히 걸렸다.”

박영효의 수신사 기간보다 넉달 앞선 5월 조미통상조약당시 국기를 교환했다는 기록이 미국국회도서관 슈펠트 (Robert Wilson Shufeldt 로버트 윌슨 슈펠트)문서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시 1882년 미국해군성 항해국 발간 세계 해양국가 국기도감 United States. Bureau of Naval Personnel., 1882 edition -Flags of Maritime Nations에 Corea-Ensign 한국-국적기(선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해군성 항해국 발간 세계 해양국가 국기도감은 882년 미 의회에서깃발에 관련한 최종 동의안을 의결하여 공개한 것으로 미국 해군성 항해 국이 보유하고 있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깃발로 각 나라 49개국의 각종 왕기(王旗), 군함기, 상선(商船)기, 국적기, 신호기, 해군 삼각기, 함대기 등의 다양한 국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태극기의 모양은 우리나라 국기의 가장 최초라고 볼 수 있으며 현재와 거의 유사한 국기의 원형 모습인 4괘와 태극문양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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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끝나기에는 이응준의 태극기는 직접 발견되지 않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조금부족하고 이미 조선왕실에서 국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 조미통상조약에서 이응준이 국기를 걸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수 있을것입니다.


1870년대 중반인 1875년 9월 일본 井上良馨 이노우에 요시카에 의한 雲揚號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은 선박의 국적기라는 국제법을 들고 나와 조선을 국제법 무지국가라는 주장으로 몰아부쳐 처음으로 국기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며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국기를 가진다는것은 형식적으로나마 모든국가가 대등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개념을 접한 고종은 지금껏 중국과도 동등한 위치를 가질 수 있다는것을 알게되고 이로서 조선은 국기를 제정하면 외교관계수립을 할 수 있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것으로 미루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이지 않던 태극기의 효시가 조미통상조약에서 수면위로 올라왔다는 생각입니다.

모양과 형태에서 그 기본을 취했을것이라는 의심이 바로 당시 어기御旗입니다.

어기는 조선의 임금을 의미하는 깃발로 정식명칭은 태극팔괘도로 이름 그대로 삼태극과 팔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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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사실은 이미 도안을 한것을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그리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배경은 이제 숙제로 남아 있지만 미국해군성 항해국 발간 세계 해양국가 국기도감에서 태극기가 발견된 이상 태극기의 박영효 최초제작설은 이제 사라져야하지 않을까요?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 위치와 크기의 혼돈이되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 도안과 규격이 통일된것입니다.

그러나 태극기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이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우리 역사에 등장합니다.

3.1운동은 하루가 아니라 3월 1일을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운동으로 정작 1919년 3월 1일에 찍힌 사진을 보면 시위참여자들의 손에 태극기가 거의 들려있지 않은 맨손 입니다.

선교사 Frank William Schofield 스코필드 박사가 3월1일 덕수궁 대한문 앞 사진을 보면 태극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극비리에 진행했던 상황이라 태극기를 준비 할 시간이 없어서였지만 3월 중순 2차시위가 일어나면서부터 태극기가 급속도로 보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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