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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Sep 15. 2022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石坡亭석파정과 석파랑

; 스물일곱, 歲寒圖 세한도의 silhouette 

오늘은 부암동에서 미팅이 있어 방문했다, 날이 너무 좋아 오랜만에 세검정부근을 둘러 봅니다.


미술관 石坡亭석파정


흥선대원군은 소문에 의하면 부암동 암반에서 왕기가 흘러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운현궁으로 김흥근金興根을 부릅니다.

김흥근의 삼계동정자三溪洞精舍를 매입하려하지만 이미 권력의 쓴맛 단맛 다 본 일흔의 노정객(老政客;나이 많은 정치인) 김흥근은 정점에 닿은 권력인 대원군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김흥근의 별장을 하루만 빌려달라는 제안을 받아낸 대원군은 고종과 함께 부암동 김흥근의 별장을 찾아 하루를 쉬고 갑니다.

그렇게 간단히 김흥근의 삼계동정자를 취하게됩니다.

(참고로 동궐,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 서궐 경희궁외에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갔던 선조가 6년 만에 돌아와 월산대군의 집에 머물게되며  慶運宮경운궁-덕수궁-이 된것같이 왕이 유숙한 곳은 왕에게 예속됩니다.)

누정(樓亭)은 백성의 공간이 아닙니다.

석파정은 은밀하게 닫혀 있는 최고 권력자들의 공간으로 그곳에 올라 경치를 즐겨 구경할 여건을 갖춘 권력가(안동 김씨)의 전유물이자 권위적인 건축이었던곳으로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단풍을 볼 수 있는 누대)라고 하니 대원군이 꼼수를 써서 취하고자 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냥 왕이 자고나니 1만 3천 평이 날아간 김흥근에게는 날벼락이죠.

그렇다고 안동 김씨의 원소유를 이야기 할 수 없는것이 바위에 새겨진 소수운렴암(巢水雲簾岩; 물속에 깃들어 구름을 발(簾)로 삼는다)이라는 말은 1721년 권상하가 친구 조정만에게 새겨준 글로 미루어 조정만 별서였다가 그가 죽고 세도정치 시기 안동김씨가 차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 김흥근은  '세 개의 작은 개울이 한군데로 모여 흐르는 곳'이라는 데서 삼계동정사라 칭했을 것입니다.

대원군은 빼앗은 삼계동정사를 북악, 인왕, 북한 세 산이 모두 바위가 노출되어 있고, 자신의 호이기도한 석파(石坡)’이라 고쳐 부릅니다. 

石坡는 산수화를 그리는 석파법(산등성이에 있는 돌출된 암벽이나 바위를 그릴 때 사용하는 기법)에서 따온 이름으로 ‘바위(石)언덕(坡)'이란 의미고 여기에 정자(亭)를 합한 것입니다.

1753년 권신응이 그린 ‘삼계동’에는 사랑채로 추정되는 건물이 전부인것과 1860년 이한철의 ‘석파정도 8폭 병풍’ 으로 미루어 김흥근이 소유하면서 많은 건축물이 앉게 되었지만 현대루玄對樓, 안채 뒤편으로 'ㅡ'자형 별채와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가 있고 전혀 다른 얼굴의 청나라 풍 정자인 지금의 석파랑은 이전되어 있습니다.

석파정은 조선 왕조가 망한 뒤 심한 운명의 부침(浮沈; 성쇠)을 겪었습니다.

왕족 소유에서 한국전쟁 이후 1950년 6·25전쟁 이후 천주교의 코롬바 고아원, 병원으로 쓰이다가 민간 소유가 됐고, 자주 경매에 나와 여러 차례 임자가 바뀌면서 오랫동안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1983년 제약회사 영업사원 시절 명동의 한 액자가게 처마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그는 창밖에서 이중섭의 ‘황소’를 인쇄한 그림을 보고 가게에 들어가 복제 프린트 그림을 샀고 아내에게 선물로 주면서 “언젠가 진짜 황소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1988년 의약품 유통회사를 차린 뒤 1990년대 중반부터 이중섭 작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2010년 ‘황소’를 35억 6천만원에 구입해 약속을 지켰고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81)이 1958년에 별채를 상명대 건너편 지금 음식점인 석파랑 자리로 옮겨가면서 연못도 없어졌고 2006년 안회장이 석파정을 인수해 대형 미술관까지 세웠는데 이게 ‘서울미술관’이죠.

안회장이 석파정을 인수하고 보니 한옥은 니스 칠로 나무는 다 삭아 니스 칠 제거하는 데만 1년 걸리고 샌드페이퍼로 갈면 무너질 상황이라 옥수수 가루를 강하게 분사해 니스를 떨어트리는 공법 채택해 복원 합니다.

석파정은 원래 4채의 한옥이 있었지만 지금은 3채만.

기존의 석파정에서 세검정 방향으로 10분거리에 홀로 따로나온 석파랑이 한식집 안채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언듯봐도 세한도를 닮은 석파정.

더군다나 석파랑의 솟을대문 천정에 세한도의 서각 판화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합니다.


한식당 石坡廊석파정


병든 순조의 명으로 1827년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시대의 질곡과 안동김씨에 맞서 싸운 효명세자는 많은 의혹을 남기고 3년 만에 죽고 안동김씨는 세자 세력을 축출하려 격렬한 정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추사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1830년 고금도로 유배당하고 10년 후엔 같은 사건으로 추사가 억울한 유배를 당하는데 아버지를 탄핵한 김우명이 대사간, 추사를 미워하는 김홍근이 대사헌이었죠. 

그래 추사는 조인영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하나, 제주 대정 땅에 위리안치된것입니다.

이런 업보속에서 시대를 초월한 대작, 추사의 세한도에 보이는 이국적인 정자가 석파랑(김흥근의 삼계동정자)의 별동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지금은 석파정과 석파랑이 분리되어 도보 10분거리에 석파정은 미술관으로, 석파정은 한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한도는 힘든 제주 유배동안 추사의 주린 학문 욕을 채워준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제자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우선이 죽고 제자 김병선을 거쳐, 그 아들 김준학이 소장하다 친일파 민영준(민영휘)이 소장하나, 그 아들 민규식이 경매에 내놓아 추사 연구가인 경성제대 교수 フジツカ チカシ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가 낙찰 받게됩니다.

1943년 여름, 추사를 존경하던 서예가 손재형이 후지츠카에게 세한도를 넘겨 달라고 담판하지만 후지츠카는 거절합니다.

1944년 여름, 전쟁 막바지를 직감한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비롯한 수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도쿄로 가버리자 소전은 세한도만이라도 찾아 올 결심으로, 도쿄 후지츠카 집을 찾게되는데 노환으로 병중인 후지츠카에게 거듭 세한도를 넘겨받을 의사를 전달하나, 후지츠카는 단호합니다. 

소전은 그림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어 두 달을 매일 지극정성으로 문안드리며 당부하자 후지츠카도 그림의 뜻을 잘 헤아려 자신이 죽으면 소전에게 넘길 것이니 돌아가라고 해도 소전 태도엔 변함이 없자 후지츠카는 진정으로 그만이 그림을 간직할 자격을 갖췄음을 알아차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명작이니 잘 보존하라며 건네 1944년 12월 세한도가 되돌아오게 됩니다.

1945년 3월 초. 후지츠카 연구실이 미군 공습을 받아 많은 소장품이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추사와 북학파 자료들은 집에 보관되어 소실을 면하고 이 중에 보존된 15,000여 점 유물을 2006년 아들 フジツカ アキナオ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가 과천문화원에 기증합니다.


소전은 1958년 제4대 민의원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절치부심 제8대엔 국회의원도 지내지만 과정에서 늘 돈이 부족해 소장품을 저당 잡힙니다.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삼성 이병철, '세한도'는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맡기나 결국 소유권을 잃고 이후 세한도는 안목 높은 수집가 손세기를 거쳐, 그 아들 손창근 소유였다가 2020년 2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됩니다. 


1958년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소전이,  석파정 중 서울 부암동 석파랑(石坡廊)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옵니다. 

석파정 사랑채 별당이 옮겨와 석파랑이 되었고, 지금은 음식점에 딸린 별채로 남았습니다.

석파랑은 추사가 자주 찾아 머물던 곳으로 옮기기 이전 석파정에서는 월천정(月泉亭)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추사는 김흥근(金興根) 큰형 홍근의 탄핵으로 유배형을 받지만 석파정 주인인 동생과는 막역한 사이로 흥근은 추사를 자주 초대하여 대접하고 그때마다 추사가 머문 곳이 바로 월천정입니다.


세한도 집은 오직 선으로만 그렸고 늙어 축 늘어진 소나무는 잎이 몇 남지 않았으며 집을 에워싸고 있는 잣나무는 잎 뻗침이 몽환적입니다. 

흐릿하게 퍼져 보인다. 'ㄱ'자 모양 집을 그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서툴고 어색합니다.

그려진 집은 간결하나 모호하며 벽엔 둥근 만월(滿月)창이 있고 시선이 다른 곳에 머뭅니다. 

뚜렷하지 않은 소실점이 그림 속에 엇갈리고 집을 바라본 시선은 오른쪽이나, 창을 바라본 시선은 왼쪽으로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석파랑은 'ㄱ'자 집으로 정면에서 보아 바로 보이는 벽에 반월(半月)창이 정갈하고 우측 벽엔 동그란 만월창은 세한도에 그려진 만월창의 실물로 추정되는 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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