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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14. 2023

느린 여행, 제주 첫번째 이야기

; (모든것으로부터) 헤어질 결심

몸과 마음, 영혼까지 차분히 명상에 잠겼던 사순절의 7주를 보내고 그 휘날레는 한라산의 봄 입니다.

4월의 봄 한라를 찾아 제주로 왔습니다.

이번여행에서는 4월 한라말고도 한적한 마을과 돌하르방 그리고 재밌는 퓨젼 음식점을 돌아 볼까 합니다.

정상말고 선작지왓도 돌아볼까했는데 아직 털진달래와 철죽의 시기가 일러, 영실코스는 다음오로 미루었습니다.

홀로 여행이라 가벼운 발걸음에 많은걸 담고 올 계획입니다.

항공권은 마일리지로 해결하고 4일간 렌탈은 홀로 여행이라 작은 2020년형 K3 차량으로 완전 자차 8.8만원에 해결했습니다.

숙소는 제주시내에서 움직이기 좋고 바다를 보기 쉬운 탑동에서 2박, 서귀포에서 올레시장과 가깝고 최애 위스키 바와 가까운 정방동에서 1박입니다.

그래, 출발 당일에는 오후는 한동안 벅적거리는 인파에 질려 끊었던 애월을 한바퀴 돌라보고,

이튿날에는 오전 성판악코스 산행을 하고 오후엔 제주시내에 산재한 돌하르방을 찾아보고 마무리합니다.

사흘째는 서남쪽 낙천리, 청수리, 대정을 돌아 숙소가 있는 서귀포 시내에 앞서 서귀다원에서 차밭부심도 부리고 시내 한바퀴(?) 

나흘째인 마지막날에는 성읍, 정의읍성에 12기의 돌하르방을 마지막으로 찾아보고 올라오는 스케즐을 생각해 봤습니다.


이번엔 출장빼고 온전한 쉼 여행이 될것 같습니다.

아직 해외여행은 이른듯해서 내년에는 국제전시회 중심으로 일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길은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습니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합니다. 


제주나기
제주나기 외관과 내부

제주나기는 제주우나기의 준말로 제주와 우나기[うなぎ 민물장어]의 합성어입니다.

첫끼를 이집으로 선택한것은 새로운 음식점을 찾다보니 보기드물게 ひつまぶし 히츠마부시를 맛볼수 있다고 해서 이 방향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서울에서는 마포의 함루나 논현동의 유나기, 서래마을 우나기야, 서초 우야등을 꼽는데 아무래도 あつた蓬莱軒 아츠나호라이켄의 맛을 내기는 2% 부족함을 느낍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끊은지 10년이되다보니 이제 가물가물합니다.

히츠마부시는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의 명물 음식으로 손꼽히는 장어덮밥입니다.

따듯한 밥 위에 카바야키(蒲焼き:장어구이)를 먹기좋게 썰어 올린 음식으로 히츠라 불리는 나무그릇에 담아 나오는데, 이것을 밥공기에 덜어서 먹습니다.

원조집인 あつた蓬莱軒 아츠다 호라이켄은 나고야 아츠타에  자리잡은지 130년된 곳으로 상표 등록도 얻고 있는 이집의 히츠마부시는 오래된 가게만이 가능한 깊숙한 맛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습니다. 

아츠다 호라이켄

장어는 3일 동안 먹이를 주지 않아 불필요한 기름기를 제거하고 맛 좋은 지방성분만 남긴 장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장히 부드럽고 입안에서 녹는 듯하고 양도 굉장히 많고 밥의 안쪽까지 다 양념이 배어들어서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중 하나 입니다.

기슈빈쵸숯(紀州備長炭; 보통 숯보다 낮은 온도에서 타고 더 오랜 시간 지속되는 특징을 가진 고급 숯-일본 최고의 야키토리와 우나기 요리에 사용)로 차분히 구워 비법 소스로 완성한 장어구이를 밥에 얹어 독특한 국물과 양념으로 당시 2,000엔정도 지금은 4,000엔정도입니다.


식전에 계란찜(茶碗蒸し차완무시)가 나옵니다.

가볍게 양송이를 얹은 부드럽고 단백합니다.

줄기상추(やまくらげ)괜찮네요.

왼쪽은 차완무시 오른쪽이 히츠마부시 한상

이집의 장어덮밥은 민물장어덮밥 히츠마부시와 저렴한 바다장어 덮밥 아나주(? 원래명칭는 あなごどん아나고돈) 2종류가 있습니다.

히츠마부시 먹는 법은 밥을 네등분해서 첫번째은 장어와 밥만, 두번째는 김, 와사비, 파 (이집엔 여기에 깻잎을 채썰어 나옵니다)등을 넣어 비벼서, 세번째는 차, 육수 (이집은 가프오 육수)등의 국물을 부어 말아서, 그리고 마지막은 앞의 세번중 가장 맛있는 방법으로 먹으면 됩니다.

아무래도 나고야의 아츠다 호라이켄의 맛을 낼수는 없지만 제주에서 맛 볼 수 있는 괜찮은 맛입니다.


후식으로 감귤젤리까지!

귤젤리는 자극적이지 않고 어울림이 좋습니다.

100% 감귤 착습 쥬스를 그대로 젤리로 만들어서 푸딩같으면서도 쫀득하고 탱탱하네요.


*장어 요리

히츠마부시 ひつまぶし 장어의 가바야키를 이용한 일본의 장어덮밥 요리

아나고돈부리 あなごどんぶり 붕(바다)장어 덮밥

가바야키 かばやき는 뱀장어, 갯장어, 미꾸라지 따위의 등을 잘라 뼈를 바르고 토막 쳐서 양념을 발라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일본 요리

우나기돈부리 うなぎどんぶり 뱀장어덮밥=우나돈 うなどん [鰻丼]

하모 はも ゆびき 갯장어 샤브샤브


구엄리

; 점심 장소와 가장 가까운곳 시골 포구와 염전

구엄리 돌빌레(돌염전)와 도대불

; 스치듯 지나는 풍광과 이야기를 품은 구엄리 바다.


아름다운 어촌 하면 항상 빠짐없이 언급되는 어촌마을, 구엄리.

구엄에서 시작하여 중엄~신엄~고내포구에 이르는 해안도로길은 제주의 해안도로에서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게 소문난 곳입니다.

배가 늘어선 선착장을 이어 걸어가면 파식대가 장관을 이룹니다.

주상절리 라고 하기에는 조금 낮아 보이는 비주얼과 외돌개근처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해안선들…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 嚴藏伊’라고도 불리웠는데 이는 ‘소금 곧 염鹽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장엄한 마을 바위巖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1977년 애월읍지 참고) 

제주는 물이 땅에 고이지 않는 지형에  서해안처럼 넓은 갯벌도 없어 소금생산에 전혀 적합한 환경이 아니죠.

우리나라 소금 생산은 일찍이 해수를 이용한 자염(煮鹽;짙은 농도의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토염)이 주를 이뤘습니다. 

해수를 가마솥에 넣어 화력을 이용하거나 염전에서 일광에 의한 해수의 증발 과정을 통해 소금을 얻는 방법입니다.

(천일염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소금입니다-우리랑 안맞죠)

염전은 대체로 강우일수가 적고 사빈이 발달하며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 입지합니다. 

제주는 비오는 날이 많고 다량의 모래를 공급받는 전형적인 사질해안이 발달하지 못해 염전형성이 불리합니다.

둑도 없는 이곳에다 바닷물을 담아 소금을 생산했던 것일까요.

구엄리의 포구를 지나면 만나는 구엄리 돌염전은 넓게 드러누운 현무암 위에 소금을 생산하던 곳입니다.

해변의 넓은 현무암 암반에는 붉은 진흙으로 만든 돌염전이 있습니다. 

고려 말 삼별초항쟁 때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부터 엄장포 또는 엄장이라고 불려졌던 것으로 봐서 그 당시부터 소금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조선 명종 14년인 1559년 강려 목사(제주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문관)가 부임하면서 구엄리 주민들에게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합니다.

김정은 제주풍토록(1520)에서 ‘서해처럼 전염을 만들자고 해도 만들 땅이 없고, 동해처럼 해염을 굽자고 하나 물이 싱거워서 백배나 공을 들여도 소득이 적다’고 했고, 이원진은 탐라지(1653)에서 ‘해안가는 모두가 암초와 여로 소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돌빌레에서 생산된 소금의 맛은 천일염보다 더 나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돌빌레 자체의 현무암과 둑으로 쌓은 진흙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미네랄이 함량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맛이 더 좋지않았을까요

구엄리 돌염전은 ‘소금빌레’라 불렸는데, 해안을 따라 길이 300m 폭 50m에 넓이가 4천845㎡에 달합니다. 

이곳 돌염전은 마을주민들의 생업터전으로 400년 가까이 삶의 근간이 돼왔으나 생업의 변화로 1950년대에 이르러 서해안 갯벌의 천일염 대량생산과 값싼 외국의 암염 수입에 의하여 수익성이 없어지자 소금밭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뭍의 밭에 비하여 값도 상당히 비쌌던 듯하다. 전통적인 밭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제주민속유적 295∼299


이 너른 돌빌레 한 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니 바위결의 모양새가 한결같지 않고 여러모양인게 참 재미있습니다.

돌빌레 칸칸엔 마치 내땅이라는 표식의 지문처럼 각각의 독특한 무늬도 새겨져 있습니다.

이재수의 난(1901) 때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 염전의 간수통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오니 참으로 사연많은 염전입니다.


포구입구에는 연 암반위에 현대식 등대의 형식을 갖춘 도대불이 있습니다.

방사탑과는 형태가 사각 뿔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도대불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의 등대로 현대 등대들의 원형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옛날 이 구엄 포구를 밝히던 도대불도 멋진 구엄리 바다의 장관에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구엄리에서는 처음에 나무(구상나무)를 세워 그 위에 장명등(잠망등이라고 발음하기도 했음)을 달아 불을 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가 삭아서 오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돌로 쌓은 원뿔형의 도대를 만들었습니다.

구엄마을 사람들이 구엄바닷가의 돌을 등짐으로 지어 날라다 만든 것이며, 이 돌들 중 일부는 용암석이었습니다.

이 도대불은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부에는 불을 밝히기 위한 30~40cm 정도의 나무 기둥이 있었습니다.

나무기둥 위에는 판자를 설치해 못으로 고정시켰다. 불은 솔칵이나 생선기름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직육면체 모양의 도대를 만들었습니다.

도대는 다듬은 돌로 대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작은 지붕을 두고 불을 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자형 2층의 형태로 현무암으로 거친 다듬을 하였고, 높이 165㎝에 철탑은 185㎝였으며, 하단은 310㎝, 상단은 197㎝였다. 철탑에는 호롱불을 보호하기 위한 갓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는데 1974년 가까운 곳에 아세아 방송국이 개국되면서 높게 설치된 안테나의 불빛이 멀리까지 보이게 되자 이 도대불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탑은 1997년 녹슬어 없어져 버렸고, 시멘트로 마감한 맨 윗면에는 '1968. 8. 5.'이라는 보수년대 표시가 있습니다.


도대불의 관리는 보재기(鮑作人,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면서 켜 두고 새벽에 어로작업을 마치고 들어오면 껐다고 합니다.

연료로는 동식물의 기름이나 솔칵 또는 석유를 썼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에는 포구도 많았고, 그 포구마다엔 도대불들이 밝혀 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상화되면서 원형의 도대불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형편인데 이곳 구엄리 도대불은 그 원형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대불 앞에 도대불보다 훨씬 크게 축조된 군사시설에 바다쪽으로의 시야를 빼앗긴, 더이상 불을 밝힐수 없는 등대...


시간을 보낼수록 더많은 볼거리와 더 많은 이야기를 주는, 아름다운 풍광에 많은 이야기까지 품어안은, 구엄리 바다.



수산리 마을

; 호수와 산과 시가 아름다운 물메


구엄리를 돌아보고 가까이 있는 물의 고장 물메마을, 수산리로.


수산(水山)이라는 이름은 물메의 한자차용표기로 물메오름(수산봉)은 정상에 물이 마르지 않는 샘물을 품고 있었고, 수산봉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수산리라 하였습니다.

물메오름은 기우제를 지내던 곳 영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봉수대를 설치했다고 해서 수산봉(-烽), 봉수대를 폐지한 후로 수산봉(-峰)으로 한자만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탁 트인 둑방과 잔잔한 물, 물을 향해 허리를 굽는 듯 서있는 곰솔나무, 그 뒤편 수산봉, 고요하고 아늑한 풍경에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산만하던 마음이 가라앉힙니다.

저수지가 필요할 만큼 예전에 농사를 많이 지었던 곳일까요? 

제주도에는 쌀농사가 많지 않았다던데, 이곳에는 붕어 같은 민물고기가 살고 있을까요?

수산리마을은 제주 전체가 겪은 아픔인 4.3 말고도 수몰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같은 이름의 동쪽 성읍의 수산리와는 구별되는데, 수산리는 당초 首山수산에서 水山수산으로 개명된 지명입니다.

물메오름 아랫동네를 하동 또는 오름가름이라 부른마을로 오름가름은 물속으로 사라진 마을입니다.

천연기념물 곰솔이 굽어보는 수산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수산저수지의 면적은 12만7169㎡, 제방 높이는 9.3m, 제방 길이는 420m, 저수량은 68만1000t, 수로 길이는 4369m 규모로 1960년 12월 12일에 준공(1959년 3월 착공)하였으며, 대호개발에서는 이 저수지를 유원지(1987년 9월 개관)로 개발하여 활용하기도 했지만 1995년 이후에 모든 시설이 폐쇄되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제주에서 가장 넓은 인공저수지인 이곳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오름가름과 원뱅디에 거주하던 마을 사람들을 비롯한 수산리 주민들의 반대에도 공권력을 동원해 토지를 몰수했고 이때 오름가름 및 벵디가름에 거주하는 70여 세대가 철거돼야 했으며, 이들은 제주시와 번데동, 당동, 구엄리 모감동 등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4·19의거로 무너지면서 애초부터 예측이 잘못된 저수지는 쌀농사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방치되었고, 수질과 녹조 때문에 밭농사 용수로도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고즈넉한 이 마을을 대표하는 8경이 있는데 2010년 마을주민들이 2022년 향년 90세로 고인이 되신 향토사학자이자 교육자인 김찬흡 선생께 의뢰해 수산저수지 주변의 아름다운 8곳을 선정했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에 성을 쌓았던 길목을 성두라 하는데, 그래 성두의 피리소리 이 고장 명예 드높인다는 뜻의 城頭笛聲 此鄕之譽 성두적성 차향지예 이 1경으로 마을 입구에 이 종들이 늘어져 있습니다.

수산저수지의 은빛물결과 어우러진 제방, 곧 둑길의 풍경인 堤岸行路 水光銀波 제안행로 수광은파가 2경, 수산봉 정상 봉수대에 오르면 사방이 저멀리까지 확트여 경치가 뛰어날뿐만 아니라, 그만큼 사방이 잘 보여 경계를 통한 마을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는 山頂烽臺 一望無際 산정봉대 일망무제가 3경, 수산봉에 도道가 기록된 옛날 비석이 있기에, 수산리가 충절로 빛난다라는 의미의 峰道古碑 忠節文村 봉도고비 충절문촌 4경이 있습니다.

5경은 수산봉곰솔의 어우러짐을 이야기하는 老松守湖 散遊至樂 노송수호 산유지락, 6경은 민족 종교의 성지인 수운교와 관련된 水雲敎堂 傳來民風 수은교당 전래민풍, 7경은 當洞亭子 綠陰民會 당동정자 녹음민회 수산봉 아래 당할망을 모시는 본향당이 있어 주로 제사를 지내곤 했던 당동의 팽나무 아래에서 민의를 논하는 모습을, 마지막 8경은 수산봉 북쪽에 대원정사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마치 충혼묘지에 잠든 젊은 넋을 위로해 준다는 院寺鐘響 萬靈鎭魂 원사종향 만령진혼입니다.

이외에도 밭담과 물매오름 그네를 돌아 봅니다.


수산리 입구와 둑방길

; 제1경 城頭笛聲 此鄕之譽 성두적성 차향지예 제2경 堤岸行路 水光銀波 제안행로 수광은파 


수산봉 바로 아래는 제주에서 두 번째 큰 면적의 저수지가 있어 과연 물과 산이 함께하는 수산리를 눈 안 한가득 담을 수 있습니다.

저수지 자체가 드문 제주기도 하지만 저수지를 자락에 낀 오름은 더더욱 없는 곳이어서 낯설고도 신비로운 풍광이죠. 

성이시돌목장 안의 세미소오름과 표선의 영주산 정도를 꼽을 수 있지만 수산저수지야말로 제대로 저수지답습니다.

현재 수산저수지 주변에는 식당과 수영장으로 사용됐던 건물과 놀이 시설 등이 방치돼 있습니다. 

수산저수지의 관리는 수산리 마을이 아닌 한국농어촌공사(?)가 맡고 있는데…적합한 활용 방법을 창출해야 할 때일것입니다.

4·3 때 성을 쌓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던 길목의 성목이나 지금은 주변에 인공폭포와 백세로가 조성되면서 잘 어우러져 또 다른 경관을 연출합니다.

저수지에 비친 수산봉의 반영을 쫓아 물메둑길을 걸어봅니다. 

수산저수지는 애월읍 수산리 하동마을이 있던 터전입니다.

1957년 원벵듸에 논을 만들고 이용하기 위하여 수산리 하동마을 72가구 중 둑방 아래쪽을 제외한 42가구와 농토가 수몰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20m의 저수지 제방 길.

잔잔한 저수지의 물결 속에 녹아 있는 수몰 마을의 아픔이 전해집니다. 

올레 16코스와 연결되어 있고, 수산봉과 잘 어우러져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둑 길을 넘던 바람 수몰된 밭과 집터에 손에 잡히는 옛 추억 

까치발 치겨 세우는 내 고향, 어린 동심 시퍼렇게 어둠을 헤쳐 달려온 별빛 

아롱진 얼굴들 저수지 수면에 채우면 세월을 헤집어 세운 수몰마을 수산리 하동

-물메 둑 길에서, 송두영


지금은 수산 저수지가 공사 진입한 상태라 물이 말라 있고... 2026년 완공된다고 합니다



 대원정사, 충혼묘지와 위패

; 제8경 院寺鐘響 萬靈鎭魂 원사종향 만령진혼, 제4경 峰道古碑 忠節文村 봉도고비 충절문촌


둑방길을 지나 물뫼오름에 오르기 위해 슬쩍 돌아서면 처음 맞이해주는 사찰이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위치라 한순간에 곰솔앞으로 나가게 되니 잘 보고 걸어야 하겠죠.

대원정사, 그리고 사찰을 지키는 주지 일조(日照)스님.

대한불교법화종 소속인 대원정사는 1933년 최청산 스님이 애월읍 구엄리 초입의 원물 지경에 초가 법당 등 세 채의 건물에 원천사로 창건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법주사 구엄포교소로 신고되었습니다. 

1942년 김금륜 스님이 기와 법당으로 증축하고 수산사로 개명하였고 4·3이 발발하면서 남로당 청년들이 원천사에 은신했다는 사실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원천사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를 맞게 됩니다. 

다행히도 원천사의 불상과 탱화, 불구는 물론 건축자재도 중산간의 극락사로 옮겨, 겨우 화를 면하지만 토벌대에 의해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총살되고 사찰이 재건된 것은 1953년 최청산 스님의 제자였던 방동화, 선두석, 오춘송 스님이 극락사로 옮긴 불상과 불화, 불구 등을 찾아와 현재의 수산봉 위치로 이전하면서 사명을 다시 원천사로 개명했지만 그럼에도 현재 불상과 불화는 찾아볼 수 없고 지금 대원정사에는 원천사의 전해지는 유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후 원천사는 1961년에 대한불교법화종에 등록 되었습니다.

일조 스님은 15세에 거동이 불편하여 대원정사의 전신인 원천사에 머물면서 당시 주지스님의 ’새로운 삶을 주신다면 부처님 받들어 세상을 이롭게 봉사하면서 살겠으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법으로 기도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한발 걸음도 때지 못하던 자신이 34일만에 걷기 시작했고 49일만에 아무 불편 없이 뛰어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출가를 결심하고 승려로서 준비할 초발심자경문을 비롯, 삼의율의 등을 배우며 더욱 깊이 있는 공부에 뜻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1959년에 원천사를 떠나 승주 송광사의 향봉스님을 찾아갔으나 당시 사찰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향봉스님의 소개로 양산 통도사의 경봉스님을 찾아 통도사 극락암에 도착했지만 역시 그곳 사정도 여의치 않아 제자이신 벽암스님을 찾아 친견하고 수계 득도하였다고 합니다.

이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원천사에서 함께 있던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1963년에 공부를 마치고 제주로 내려와 원천사에서 수행을 시작했고 1973년에 주지로 취임한 뒤 76년에 영실에 있던 기림정사와 도성사를 합병하고 1978년부터 대적광전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도에 완성하고 대원정사로 사명을 개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극락세계 입구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락교가 보이고 다리 위로는 이 절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들이 세워있습니다.

가람은 2층 구조로, 아래층은 종무소와 요사체가 있고, 2층으로는 대적광전과 종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법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셨기 때문에 대웅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현판이 대적광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불이 비로자나불일 경우 대적광전이라고 하는데, 법화종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화신불로서 청정법신이기 때문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하나의 부처님으로 보기때문이라고 합니다.. 

큰 법당 앞에는 사찰의 나이테를 간직한 느티나무와 왕벗나무가 나뭇가지 곳곳은 이끼가 끼어있지만 세월의 흔적일 뿐 나무는 아직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마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법당 앞마당 잔디밭에 앉아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봄바람을 흘리게 됩니다.


사찰의 서쪽 자락에는 충혼묘지가, 사찰내에는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삼월삼짇날(음력 3월 3일) 충혼제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따금씩 들려오는 원사의 은은한 종소리는 나라를 위해 순국한 모든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듯합니다. 

봉도고비 충절문촌(산자락 오래된 묘비, 충절문촌 증거한다)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은 士禎高漢柱(靈雲 髙景晙 부친)의 생애와 업적을 기린 묘비


제5경 老松守湖 散遊至樂 노송수호 산유지락


대원정사를 나와 물뫼길을 걸으면 이내 보게되는 곰솔은 멀리서 봐도 예사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가 많습니다. 

제주도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가 두 곳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나이가 600년으로 짐작되는 산천단 곰솔 무리(8그루)로 제주목사가 백록담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날씨가 안 좋아 올라갈 수가 없으면 이곳 곰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하나가 400년 된 천연기념물 제441호 이곳의 곰솔인데 수산리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에 눈이 덮이면 마치 백곰이 물을 먹는 모습으로 보여 ‘熊松(곰송; 곰을 닮은 소나무)’로 불렀다고 전하지만, 학계에서는 ‘곰솔’의 뜻을 ‘검은 나무껍질을 가진 소나무'로 원래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 곧 해송은 바닷바람(해풍)을 맞아 껍질이 검어지는데 그래서 ‘검솔’이라고 했고 이 검솔이 곰솔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 곰솔은 해송이라고도 부르고, 줄기에서 검은 빛이 돌기 때문에 흑송이라고도 합니다.

전해지는 말처럼 곰처럼 보여서 곰솔이라고 부르는 건 아닌 것같지만 물가 둔덕 아래로 굵은 가지를 가만히 내려놓은 생김새를 보면, 물을 마시려고 몸을 한껏 웅크린 곰을 연상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키가 12.5m이고 가지를 24m 넘게 펼친 수산리 곰솔은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어찌 사연이 없고, 내력이 없을까요.

마을이 처음 들어설 때, 마을 선조가 수호목으로 심어 가꾸기 시작했으며, 그 후로 오랫동안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살아온 수산리 곰솔은 가지마다 숱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것입니다.

돌보는 사람 없이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세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나무만이 가질 특권으로,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듯 비바람, 눈보라 다 이겨내며 이만큼 멋진 자태를 갖추게 되었을것입니다.

수산봉이 굽어보는 저수지 위에 늙은 나무 곰솔이 세월의 무게를 담은 나뭇가지를 물가에 드리웁니다. 

몇 백 년의 세월동안 곰솔은 수산마을 사람들의 수호신이 되어 나무 곁을 찾는 사람들의 기원과 고달픈 인생살이, 집안 소소한 즐거운 이야기를 무수히 듣고 공감했을 나무가락 끄트머리에 할비의 애잔한 감정이 묻어납니다.


물뫼오름, 호반, 밭담길과도 너무나 잘 어우러질것 같은 오래된 호반 지킴이 노송은 곰 모양 소나무든, 검은 빛 소나무든 오래오래 탈 없이 잘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3경 山頂烽臺 一望無際 산정봉대 일망무제(수산봉정상)과 수산봉 그네


수산봉 그네는 누가, 왜,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수 없지만 3년전 봄즈음부터라는 어렴풋하게 남아 있습니다.

언덕 중턱 소나무에 가지런히 매달아 놓은 그네는 조금은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주인을 기다립니다.

지금이야 어수선한 공사분위기로 고즈넉한 느낌을 받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곰솔 나무로 가기 전에 있는 언덕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그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곰솔보다는 조금 작은 나무에다가 그네를 설치했으며 2020년 3월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인증샷이 하나둘 올라온 이후 많은 분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수산봉 정상도 레이더 설치를 위한 타워 공사가 시작으로 어수선하기는 마찮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공사를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수산봉 맞은편 일주도로에 내걸었고 일부 마을은 공사 현장을 직접 방문하겠다며 집단행동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립니다.


제7경 當洞亭子 綠陰民會 당동정자 녹음민회
제6경 水雲敎堂 傳來民風 수은교당 전래민풍


수산리 8경중 7경 當洞亭子 綠陰民會 당동정자 녹음민회는 수산봉 아래 당할망을 모시는 본향당이 있어 주로 제사를 지내곤 했던 당동의 팽나무 아래에서 민의를 논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물뫼오름을 돌아나오면 팽나무를 볼 수 있는데 물뫼밭담길을 이어가는 차분한 시골마을을 느끼게 합니다.

6경은 민족 종교의 성지인 수운교와 관련된 水雲敎堂 傳來民風 수은교당 전래민풍입니다.

수산리 하동에 마을을 대표하는 산물인 큰섬지가 있는데 이에 해당합니다. 

하동은 수산봉이 있어 '오름가름(‘오름마을)이라고 불렸으며 산 밑에 있어 하동(下洞)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처럼 샘을 의미하는 제주어인 ‘세미, 새미’라 하지 않고 ‘섬지’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산물의 뜻으로 ‘섬지’가 쓰이는 특이한 지역입니다. 

섬지는 ‘물이 고인다’는 뜻으로 ‘샘이 있는 땅’이란 의미입니다.

큰섬지는 수산서6길 수은교 남쪽 수산천 냇가 큰섬지교에 있는 대천(大泉)이라 부르는 큰 산물입니다. 

장전, 소길리 사람들까지도 이 산물을 이용했을 정도로 풍부하게 솟아나는 마을의 식수원이었습니다. 

이 산물은 물허벅여인상이 있는 벼랑(언덕) 측벽과 끝에서 용출되는 산물로 마을에서 보호시설을 설치하여 보존 중입니다. 

산물은 우물처럼 원형의 통을 갖고 있으며 통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

마을에는 공섬지, 명세왓섬지, 동녁섬지, 새섬지라는 산물도 있습니다. 

공섬지는 수산 저수지 안 동측에 있었는데, 지금은 수산저수지에 잠겨 버렸고, 명새왓섬지는 공섬지 하부 400여m 지점에 있는 물로, 굿을 할 때 제상에 올리는 돈인 명전(命錢)을 말합니다. 

동녁섬지는 마을회관 남쪽 수산봉의 동쪽에 있었던 산물로, 여의돌(섬돌, 디딤돌)이 있다하여 여웃못(여윗못)이라고도 하고, 새섬지는 수산봉 서쪽에 있는 ‘새로운 샘’이란 뜻의 산물로 수산저수지 제방에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시간여유가 있다면 수산리의 특별한 매력은 바로 116개의 시비(詩碑)와 함께 걷는 밭담길을 걸어보는것도 좋을것입니다.

수산리는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시인협회와 업무 협약을 맺고 협회가 선정한 한국 100대 시인의 작품을 제공받아 '시가 흐르는 마을 돌담길'을 조성했고 돌담길에는 유명 시인의 작품들이 새겨져 있어 시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수산리를 돌아 보고나면 다음으로 들러보면 좋을곳이 수산리 끝자락 장전리 디자인샵 ‘Tutti colori 뚜띠콜로리 뮤제오’가 있습니다.


디자인샵 Tutti colori  뚜띠콜로리 뮤제오

상호가 재밌습니다.

Tutti colori musèo 모든 색의 미술관


스타트업도 관심이 가지만 제주만의 색을 가진 캑릭터 확실한(방향 없는 창업이 많아서) 스타트 업이라면 너무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디자인이 메인 직업인 사람으로 이를 볼 수 있다는것이 너무 좋습니다.


컬러하면 생각나는 글로벌기업이 두곳 있지요.

벤자민무어와 팬톤.

세계적인 국내 가전 브랜드 두곳 중 LG전자가 개발한 오브제 컬렉션은 밀레니얼, X세대, 베이비부머 등 다양한 세대의 취향을 아우를 수 있도록 세계적인 색채연구소인 미국 팬톤컬러연구소와 오랜 기간 협업을 통해 색상을 개발한것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다른 한 곳인 삼성의 비스포크도 분야별 전문 업체들과 오픈 협업 시스템인 ‘팀 비스포크’를 구축했는데, 디자인에서는 글로벌 프리미엄 페인트 회사인 '벤자민 무어'와 협업했습니다.

지난해, 수산리에 조그마하게 실체를 드러낸 뚜띠 콜로리 뮤제오 Tutti colori musèo는 1950년에 시작한 후발주자로 1883년에 시작된 Benjamin Moore & Co.벤자민무어와 어깨를 견주는 Pantone 팬톤을 꿈꾸는 디자인 회사, 컬러랩제주(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2020년 2월 오픈)가 제주 자연에서 얻은 감동과 에너지를 일상에 가치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대표 브랜드 오픈매장입니다.

디자인기업 컬러랩제주는 제주의 바다색, 식물, 날씨 등에 영감을 받아 ‘제주에서 나만의 색 찾기'를 주제로 한 아트 클래스, 제주 고사리와 현무암 그리고 유채꽃을 베이스로 한 디자인 제품등 다양한 영역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습니다.

뚜띠콜로리 뮤제오는 제주의 100년 된 가옥을 리모델링하여 뚜띠콜로리 브랜드 감성을 가득 채운 공간으로, 애월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는 유수리암과 소길리 근처에 나즈막한 동네 분위기가 명소인 곳에 위치합니다.


뚜띠콜로리 뮤제오에서는 나만의 색 찾기, 컬러 헌팅 키트와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근처에 살롱도 운영하는데 이곳은 이번에는 넘어 갑니다.



돌하르방


한라산, 올레길, 흑돼지, 회, 감귤...

제주,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들어서면 제주를 상징하는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화된 수 많은 제주들... 한때 돌하르방 열풍이 불어닥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관광 상품가운데 전세계로 가장 많이 팔려나간 제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돌하르방이 아닐까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 기념품은 물론이고 돌하르방의 이미지를 이용한 상품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져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돌하르방이라는 명칭도 따지고 보면 붙여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우성목, 무성목,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옹중석, 망주석과 뒤섞여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주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던 1971년에 제주문화재 위원회에 의해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제주의 지식인이었던 김석익이 쓴 편년체 역사저술서 탐라기년에 따르면 돌하르방은 조선 영조 30년(서기 1754년) 김몽규 목사가 세웠다고 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놀랍게도 돌하르방은 실존 모델이 존재했다고 하는데요. 

다름 아니라, 중국 진시황 때 거인장사로 이름을 날리며 흉노족 등 이민족을 물리친 완옹중(阮翁仲)이 그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당시 잦은 흉년에 전염병까지 돌자 이를 막기 위해 수호신격으로 완옹중의 석상을 만들어 제주읍성 밖에 세웠다는 것이 돌하르방의 유래에 관한 기록입니다. 

제주 지식인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모임(계)인 담수계(淡水契)가 1953년 펴낸 『증보탐라지』에는 돌하르방이 제주읍성의 동, 서, 남 등 삼문 밖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에 단 한 줄 언급된 이 기록만으로 돌하르방의 기원을 결정짓는 것은 성급할 수 있습니다.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돌하르방이 외래의 요소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견해와 제주의 자생적인 조형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외래 기원설은 북방기원설(몽고기원), 남방기원설(발리섬기원)과 육지전래설(벅수전래)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확한 정설을 이야기 할수는 없습니다.

실제 남아 있는 돌하르방을 찾아보는것도 재밌을것 같아 이번 여행에서는 이들을 돌아봅니다.

왼쪽 돌궐계 석인상 일부 대정현성 돌하르방과 오른쪽 복신미륵과 돌하르방

이른바 '원조'라고 불릴 수 있는 유서 있는 돌하르방은 모두 47기로 추정되는데요. 

옛 제주목(현 제주시내)에 23기, 대정현의 소재지(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인성리, 안성리 등) 일대에 12기, 정의현(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등) 일대 12기 등 모두 47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가운데 제주자치도 민속문화재(2호, 1971년 8월 26일 지정)로 지정된 것은 제주도 밖으로 반출된 2기를 제외한 45기입니다. 

돌하르방들은 최초 성을 중심으로 성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흡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장승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제주목 출신 돌하르방들 중 상당 수는 현재 도시 개발의 여파 등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08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현 박물관 요나라 석인상과 제주 관덕정 돌하르방

제주목(제주시)에 있는 돌하르방의 경우 대정현(서귀포시 대정읍)과 정의현(서귀포시 표선면)과 비교해 체구가 크고 얼굴의 음각선이 깊어 강한 느낌을 갖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조형미가 뛰어난 점도 특징으로 꼽힙니다.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제주목의 돌하르방입니다. 

이에 반해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아담하고 소박한 맛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평균 신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제주목 돌하르방은 평균 181.6cm가량이고, 정의현과 대정현 돌하르방은 각각 141.4cm, 136.2cm로 차이가 납니다. 

또 정의현 돌하르방은 주먹을 쥔 듯한 손 모양을 띠는 반면, 대정현 돌하르방은 손바닥을 편 모양새입니다. 

제주목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에는 받침석이 있는 반면, 대정현의 돌하르방에서는 받침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르고 보면 비슷하지만 알고 본다면 그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이제 시작합니다.



제주시내 돌하르방 제주KBS(17,18),
관덕정 4기(1,2,5,6),
목관아2기(19,20)


이제 애월에서 숙소인 제주시내로 들어오는길에 이번 여행 두번째 목저인 돌하르방 첫 장소를 방문합니다.


KBS 제주방송총국 입구에 2기의 돌 하르방이 있는데 이는 신축 이전하기전, 연동 구 청사에서 2014년 10월 28일 이전한것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 45기 중 17, 18호로 문 밖에 세워진 8기의 돌하르방 중 바깥쪽 옹성굽이에 있던 4기 돌하르방이 1966년 제주민속박물관으로 2기가 옮겨졌다가 제주KBS방송국으로 이설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2기는 지금 제주시청에 있는데 이 4기를 직접 마차를 이끌고서 돌하르방을 옮겼던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의 전언에 따르면 4기 모두 기단석을 함께 옮기지 못해서 지금 것은 나중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호텔 체크인하고 시간에 쫒겨 부랴부랴 목관아로 향합니다.

목관아 관람시간이 오후 6시인지라 후다닥 움직여 관덕정 4기(1,2,5,6)와 목관아 2기(19,20)를 확인 합니다.


관덕정에는 네 귀퉁이에 각 하나씩 네 개의 돌하르방이 있습니다.

1호와 2호, 정면의 2기와 5호와 6호, 후면의 2기.

이 돌하르방은 서문 밖 돌하르방 8기는 일제 말기에 이곳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목관아내의 2기(19,20)는 남문 밖 8기 중 2기 입니다.

정원루(定遠樓)가 세워져 있던 남문지는 제주시 이도1동 1494-1번지 일대로서, 남문로터리가 크게 들어서면서 성문 앞의 옹성굽이 길목은 거의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남문 밖 돌하르방의 경우도 위치 이동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1954년 담수계(淡水契)가 펴낸 증보탐라지의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남문 밖 8기 돌하르방 가운데 4기는 삼성혈 입구 및 관덕정 앞으로 2기씩 옮겨졌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로 또 옮겨졌고 옛 제주여고(현 제주KAL호텔)에 있던 2기는 제주공항으로 이설했다가 최근 제주목관아 경내로 다시 옮겨진 것입니다.


안녕전복


내일 산행을 위해 이 좋은 안주의 천국 제주에서 무알콜의 밤을 보냅니다.

물론 마신다고 산행을 못하는것은 아니지만 근 10년만에 40일간의 사순절동안 몸과 마음, 머리까지 제독을 하고 마무리하는 여행인지라 차분히 시간을 보내기위해서입니다.

그래 저녁은 운영종료전의 목관아의 돌하르방을 둘러보고 바로 그 옆에 똭 또아리를 틀고있는 전복집에서 가볍게 전복죽을 먹으러 갑니다.

이 집은  2018년 8월 오픈한 To-go가 주력인곳으로 알콜빼고 식사를 캐주얼하게 즐기기 적합한 곳으로 저녁 7시에 마감합니다.

전복은 바다를 접한 지방인 제주를 비롯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와 황해도에서는 자주 진상해야 하는 품목이었습니다. 

제주도의 전복 진상은 매월 잡히는 대로 지속적으로 수군통제사들을 통해 운송해야하니 진상품 중 가장 어려웠던 식품이었을 것입니다. 

공선정례에 기록된 월별 진상 품목을 보면 제주도에서는 2~9월까지 각 전(殿)에 보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말린 전복으로 진상되나 생복은 추운 계절, 충청, 황해 등 궁과 가까운 지역에서 봉송되었습니다. 

궁중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전복이 자주 등장하니 가장 귀한 재료며 최고의 식재료로 쓰였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복이 맛있고 귀해서만 궁중에 애용하는 식품으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조개류는 피로해진 신경을 회복시키는 작용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복은 눈의 피로 회복에 매우 좋습니다. 

아르기닌이라는 아미노산이 타 식품에 비해 월등히 많이 함유되어 있고 인, 철, 요오드, 칼슘 등의 미네랄과 비타민 A, B1, B2 등도 풍부하여 자양강장식품으로 여깁니다. 

햇볕에 말린 전복포는 강장식품이었다니, 궁궐에서 당연히 왕족들의 건강을 위한 일급 식품으로 여겼을 것이겠죠.

제주 여행의 시작부터 중간중간, 그리고 끝 모두 전복 요리로 채운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제주에는 전복을 이용한 다양한 향토 음식과 더불어 맛집이 많습니다. 

제주 역시 (해녀들의 바닷가 전복회가 아닌 다음에야) 자연산이 아닌 양식 전복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제주가 아닌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완도산입니다.

안녕 전복은 공항 근처에 있어 특히 여행의 시작과 끝에 방문하면 편리합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많은데 전복 버터구이 초밥이나 전복 아보카도 비빔밥, 전복 야채 네모 밥 등 전복을 이용한 퓨전 요리들이 눈길을 끕니다.

전복 자체의 생물 상태가 좋아 기본 이상은 하는 집입니다.


그리고….이제 맥주 한캔 사 들고 숙소로 갑니다.

지난주에 서점에서 산 신간 한권이 궁금해서 읽다가 잠을 취해야 할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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