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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pr 16. 2023

느린 여행, 제주 세번째 이야기

; (사유하는) 餘여...여백餘白, 여운餘韻

세번째날은 4시에 시작했던 둘째날 여유롭게 7시에 눈을 뜨고 8시에 체크아웃하고 느리게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청수곶자왈을 예약했는데 인원부족으로 취소되었네요.

어쨌든 오늘은 돌하르방 장소중 대정읍성으로 가야하기때문에 서쪽으로 움직여 봅니다.

숙소는 서귀포 구시가지 이중섭거리 근처로 정해서 제주도 서쪽 반바퀴를 돌아가는동안 생각나는 곳을 들리기로 합니다.


우진해장국


산행 후 푸짐한 저녁과 함께한 반주, 소주에 이어 칵테일 몇잔과 몰트위스키를 마신 전력으로 해장을 위한 아침 선택은 해장국이 됩니다.

제주에서 해장국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별미로 즐겼던 3개월 정도 된 돼지고기를 다져서 참기름, 마늘, 생강, 후춧가루, 고춧가루, 간장으로 만든 양념을 국물처럼 먹던 돼지새끼회가 전신이된 어제 아침의 은희네 해장국 스타일로 은희네해장국의 원조 역할을 했던 대춘식당이나, 50년 이상 새벽을 열며 제주식 기사식당 미풍외에도 순풍, 곰, 봉, 우경, 삼일, 방일, 미향, 공단, 동부두, 삼십년, 광양등이 있고 홍창, 대창, 곱창 그리고 양 베이스로 만든 백성원 해장국(전 양대곱), 그리고 제주산 고등어를 푹 끓여 살을 발라내고 우거지 등의 야채를 넣어 해장국을 끓여내는, 추어탕스타일의 성미식당의 고등어 해장국등이 있습니다.

오늘 해장으로 서문사거리 부근 복개추차장 인근의 약간은 생소한 이름인 고사리육개장을 먹습니다.

제주고사리를 고기와 함께 갈아 넣은 걸쭉한 국물의 맛이 일품입니다.

처음 접할때 비줄얼은 젓갈같기도하고 비릿내도 날것 같고…...

한술 뜨면 이런 걱정들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밥에다 비벼 먹어도 맛있고, 말아먹어도 맛있고, 국물만 떠먹어도 맛있습니다.

제주의 여느 해장국집 처럼 함께 나오는 청양고추는 정말 매우니 조심해야합니다.

이 집도 이제 기본 웨이팅을 생각해야하는곳이되었습니다.


낙천리아홉굿의자마을 


한경 낙천리, 아홉굿마을을 찾았습니다.

낙천리 樂泉里 아홉굿 마을

산행을 하고난 다음날은 첫날 돌아봤던 물뫼마을 아래, 한경의 낙천리를 찾습니다.

한경면 중앙에 위치한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서쪽에 있는 샘이라는 뜻의 섯세미입니다.

한자 표기로 서사미(西思味) 또는 서천미(西泉味)로 불려 왔습니다.

그 후 낙세미라고 불리어졌는데 이는 샘이 풍부한 고을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산간 지역임에도 분지형으로 되어 있어 물이 잘 고였기 때문에 1970년대 이전까지 인근 마을 주민들도 갈수기때마다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낙천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300여 년 동안 풀무작업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구덩이가 생겼는데 파낸 그곳이 점토질이라 물이 잘 고였고 그래, 흙을 채취한 자리는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못이 되었는데 그 수가 30여 곳이 넘었지만 농지개간과 도로 확장 등으로 대부분 매립되었습니다.

‘아홉굿 마을’이라는 명칭은 그렇게 풀무업(대장간)이 성행할 당시 솥과 쟁기 등을 만들기 위한 쇳물 을 담기 위해 필요한 흙을 채취하면서 생겨난 9개의 연못에서 유래하여 숫자 9에 제주어로 구덩이를 의미하는 ‘굿’이 합쳐지며 ‘아홉굿’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진것입니다.


물이 귀했던 시절, 그 연못들은 소와 말뿐만 아니라 물허벅 행렬이 줄을 이을 정도로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제공했고 이런 생활상을 반영하듯 즐거운 '락(樂)'과 내 '천(川)'을 써서 '낙천리'라는 지명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낙천리 아홉굿 마을이 만들어진것입니다. 

9개의 연못을 합쳐 저수지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민물낚시와 농업용수를 조달하는 수원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낙천리 아홉굿을 '의자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2009년 의자공원을 개원하고인데, 연못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연못 한가운데 의자가 한 자리 차지하며 이색적인 풍광을 자랑했고 그해 사람들은 테마마을 프로젝트로 마을 상징물로 의자를 선정하며 마을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의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의자에 써넣을 이름과 문구를 공모해서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글귀를 각각에 적어두게 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하하며 입소문은 전국으로 이어지게 된것입니다.


아홉굿 마을-김신자 시인


늦가을 가뭄에도 낙천리는 굿판이다

선무당 신칼처럼 내리치는 냇물 몇 줄

그 은빛 아홉굿 마을, 가을볕이 실린다


이 마을에 내가 든 것도 아홉수가 걸려설까

집집마다 물팡 곁에 모셔놓은 도채비당

친정길 만난 삭정이 그도 함께 빌고 간다


상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사랑이었으리

해녀 물질 끝나도 끊지 못한 뇌선 같은

못다한 내 시 한 줄에 신칼을 대고 싶다


돌하르방 네번째 대정읍성 


인적마저 드문 조용한 낙천리 아홉굿마을을 뒤로하고 다음에 대정의 12기 돌하르방을 찾아갑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 인성, 보성리 일대에 자리한 대정현성 3문 앞에는 각각 4기씩 돌하르방 12기가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돌하르방 위치가 많이 옮겨져서 원형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최근 그 자리를 찾았네요.

덕분에 움직임이 짧아졌습니다.

돌하르방의 규모는 제주읍성과 정의현성의 넓이나 규모에 비해 가장 적고,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원래 대정현성은 1418년(태종 18) 처음 축조할 때 제주읍성이나 정의현성과 달리 동서남북 4문을 만들었으나, 북문은 나중에 폐쇄시켜 그 후로는 3문만 남아있습니다.

대정읍성 동문지 4기

대정현성과 정의현성의 돌하르방 조성 시기가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1754년이나 그 이후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현성의 축조 등을 보면 대정현성 돌하르방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특히 대정현성 돌하르방 중 서문지 돌하르방(민속자료 2-34호)에서 외래적 요소가 나타난다는 학계의 주장은 북방전래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돌하르방들이 15세기 전반기 대정현성 성문 앞으로 옮겨가며 성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재정읍성 남문지 4기

미세한 차이점을 찾아본다면,

제주시에 있는 돌하르방의 경우 대정과 성읍과 비교해 체구가 크고 얼굴의 음각선이 깊어 강한 느낌을 가지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조형미가 뛰어나 흔히 생각하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제주시의 돌하르방입니다. 

이에 반해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아담하고 소박한데,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평균 181.6cm가량이고, 성읍은 141.4cm, 대정은 136.2cm입니다.

형태로 본다면 성읍 돌하르방은 주먹을 쥔 듯한 손 모양을 띠는 반면, 대정 돌하르방은 손바닥을 편 모양새입니다. 

제주시와 성읍의 돌하르방에는 받침석이 있는 반면, 대정현의 돌하르방에서는 받침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정읍성 동문지 4기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 근처라 함께 돌아봅니다.

지난해 내부수리를 마치고 재 개관을 한 추사기념관은 지난 2010년에 개관한 곳으로 설계자는 입찰 대상이지만 문화재청장의 권한으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명한 승효상. 

추사 김정희가 제주유배 시절 그린 걸작 ‘세한도(국보 180호)’의 건물을 본떠 형식에 얽매지 않되 그의 정신을 투영하고 장식요소와 기교는 절제해 디자인이지만 동네 어른들은 창고같다고 불만이었습니다. 

명예관장인 유홍준은 '추사 간독첩', 간찰인 '제주목사 장인식에게' 등 추사유물 17점 기증했습니다.

추사기념관 뒷쪽에는 기념관을 돌아보고 출구로 이어지는 동선에 놓인 추사가 유배시절 묵었던 적거터가 함께 있습니다.

1840년 안동 김씨는 병조판서 추사가 눈의 가시였습니다.

10년 전 윤상도의 상소문을 추사가 초안한 걸로 꾸미고 윤상도는 결국 1840년 유배지에서 의금부로 압송되어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당하고 고향집에서 자고 있던 추사도 의금부로 압송, 제주도 유배갑니다.

1840년 9월 27일 제주도 가는 배 올라 제주도 화북(원래 탐라국의 도읍이었으나 938년 고려의 속국이 된다) 도착합니다.

교리(校理 종 5품의 선비) 송계순의 집에 기거하다, 한라산을 넘어 대정으로 가 1년 후 더 큰 집인 교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래, 이 집은 추사학당이 되고 추사체를 완성합니다.

1946년 4.3 사건 때 화재에 소실된 후 1984년 후손의 고증에 의해 복원된것입니다.

누마루로 진입하면 제주도식 초가 4채가 보이는데, 정낭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안채, 바깥채, 별채, 통시(제주도식 화장실)이 ㅁ자 마당을 만듭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수선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대정향교에서 추사적거지로 거닐다 보면 가장 반가운 존재는 수선화입니다.

추사유배지와 대정향교, 그저 탱자나무 아래 몇 그루의 녹차나무와 담장 아래 수선화 몇 포기가 피어 있을 뿐이지만, 한국에서 가장 기품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옛 문인의 삶에 취하고 이제 갓 시작된 봄에 취하고 수선화의 향에 취합니다.

사부작10 

갑자기 텐동.

모슬포는 후배들과 술퍼마신 기억이나, 스쿠버 다이빙, 그리고 방어회가 머리속을 채우는데 이곳에 재미난 집이 생겼습니다.

정호영셰프 출신 학교로 세계 요리 3대 학교인 쯔지를 졸업후 한국에 돌아와 오직 덴뿌라를 중심으로한 일본식 가정식 요리만을 고집하며 덴뿌라로 1인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제주도에 사부작텐을 오픈했네요.

첫 오픈은 한림(금릉)이었는데 이곳으로 이전 오픈했습니다.

이집 우동나베나 쇼가야끼는 soso라고 할 수 있지만 텐동만큼은 정말 좋습니다.

식재료도 훌륭하고 튀김옷도 좋습니다.

묻지도 따지지 않고 天丼(てんどん: 텐동)입니다.

주문할때 잊지말고 おんせんたまご 온센타마고 (온천계란) 추가하세요.

이건 필수 입니다.

쯔유양도 적당합니다.

튀긴 기름도 묵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선함이고…


서귀다원


십년지기 서귀다원에서 차멍…

서귀다원은 녹차밭 너머로 한라산이 바라다보이는 전망이 단연 으뜸입니다.

서귀다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기기묘묘한 제주 현무암이 사열한 녹차밭 사잇길을 지나면 운치있는 삼나무길이 이어집니다.

길 끝에 앉은 아담한 다실에는 팔순 어르신과 그 따님이 세월을 동행하시고.  

할아버지의 칠순기념으로 일본의 가고시마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 녹차밭에 반해 15년 전 시작한 게 지금의 서귀다원입니다.

주변에서는 퇴직금으로 그냥 편히 살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극구 만류했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꿈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꿈이 지금의 다원을 이룬 것이죠.

유기농을 고집한다는 서귀다원은 정갈합니다.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내려오는 도로 중산간 부분에 위치한 다원인지라 초행자의 어프로치가 쉽지 않았는데 감속차선을 설치 했네ㅇ.

새롭게 측량한 내용에 대지 경계선이 잘못표시되어 울타리를 새롭게 공사 했고 이 때문에 입구 주차장이 좁아져 다원윗쪽에 주차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다실에서는 무료로 녹차를 마시는 시스템으로 바꾼다는군요.

아무래도 방문객이 많이 늘어나다 보니 이 편이 좋을듯 합니다.

녹차밭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는 큰 돌을 쌓아 석축을 만들고 그 위에서 이 멋진 곳을 바라보며 차멍을 할 수 있게 했네요.

응원합니다., 나의 10년지기 서귀다원.

이제 서귀포의 숙소로 이동해 체크인하고 잠시 쉬었다, 저녁시간으로 이동합니다.

모루쿠다, 그리고 바 머스크


원래 사장님을 알게된 곳은 동홍동 본점인데, 그곳은 오랜시간동안 휴점중인지라 올레시장점에 들렀습니다.

모루쿠다는 쌩뚱맞게 일어와 제주방언의 합성어입니다

사실 이집의 시그니쳐 메뉴는 어탕수인데...

너무 강력한 집을 알고 있어, 패쓰하고 궁금한 차수에 한치부추무침을 배추에 싸먹는 메뉴를 산택했습니다

기본찬으로 단무지, 배추절이, 고추피클이 한 접시, 사라다, 잼난 야채 장아찌, 그리고 2조각 담긴 참치샐러드가 나왔는데 이번에 가니 장아찌, 초장미역, 그리고 마카로니 샐러드만 나오네요.

미나리를 얹은 한치무침은 여전히 무난한 한치숙회무침이었는데 차슈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맛은 그날 그날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오늘의 흑돼지는 알던 모루쿠다의 맛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좀 아쉽네요.

원래, 모루쿠다의 돼지고기는 叉燒챠슈는 가격에 비하면 좋은 평을 주고 싶은 익힘에 부드러움과 적당한 촉촉함이 캐릭터 였는데…다음 방문때 다시 와봐야겠습니다.


Bar MUSK


그리고 조용히 한잔 더 할 수 있는 서귀포 최애의 바 머스크에 들러 마티니와 위스키로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직원이 줄었네요.

원년부터 있던분과 대표님 두분이 서브를 해 주십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로 3시간이 순삭…

몽키숄더 스모키.

처음보는 위스키 라벨이 눈에 들어와서 마셨는데 조금 작위적입니다.

그래, 바로 오리지널 몽키숄더 한잔 합니다.


Monkey Shoulder 몽키숄더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위스키 제조과정에서 싹틔운 몰트를 건조시키는데, 발베니 등의 일부 증류소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인부가 직접 몰트 건조장에 들어가 맥아를 뒤집는 과정을 고집합니다. 

이 과정을 ‘Malting 몰팅’이라 하고 몰트를 삽으로 뒤집는 Floor Malting 플로어 몰팅 작업자를 ‘Malt Man 몰트맨’이라고 부르는데 수십년 동안 삽으로 몰트를 뒤집는 과정에서, 어깨가 아래쪽으로 쳐지고 휘어지는 직업병을 얻게 되는데 이 모습이 원숭이의 어깨와 닮았다고 하여 몽키 숄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는것은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몰트를 적절하게 고루 뒤집는 작업에 매진한 장인들의 위스키를 향한 애정과 헌신을 기리는 이름인것입니다.

2005년, 몰트맨의 헌신을 기리고자 몽키숄더 위스키가 출시하게 된것입니다.

이름뿐 아니라 몽키숄더 위스키의 블렌디드도 재미있습니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아닌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스카치 위스키는 크게 오직 보리에 싹을 틔워 말린 맥아만 써서 POT STILL 팟 스틸 이라는 단식증류기에 두번 증류해 만든 malt whisky 몰트와 보리 외의 곡물을 사용해 연속식 증류기로 증류해 만든 grain whisky 그레인으로 나뉩니다.

(이건 담에 한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하나의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를 ‘single malt 싱글몰트’, 여러 증류소의 몰트 위스키를 섞은 것을 ‘blended malt 블렌디드 몰트(pure malt 퓨어 몰트)’라고 하고 조니워커나 발렌타인같이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으면 ‘blended 블렌디드 위스키’가 되는것입니다.

몽키숄더의 emblem은 한미리면 되는 원숭이를 세마리나 겹쳐 놓았습니다.

몰트맨들에 헌정한 william grant & sons 윌리엄그랜트앤선즈사는 싱글몰트의 대명사로 알려진 Glenlivet 글렌리벳과 자신들의 대표 몰트인 Balvenie 발베니, 그리고 자시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위해 발베니 증류소 내에 만든 Kininvie 키닌비 이렇게 3가지 몰트를 블렌디드해서 만든 몽키 숄더의 상징이 3마리 원숭이로 정해진것입니다.

몽키 숄더는 비교적 부드럽고 풍부한 바닐라와 과일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향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오렌지 향, 바닐라 향, 꿀향에 약하게 스파이시한 맛이 가미된 부드러움을 극대화 시킨 맛입니다.

맥캘란, 글렌리벳, 글렌드로낙, 발베니등 묵직한 전통적 스카치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은 많이 부족하지만 향긋한 위스키 느낌이 무거운 전통적인 스카치 위스키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열대과일,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향을 향긋한 베리류의 향에 얹어서 복합적인 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스타일리시하고 화려한 느낌으로 기존 위스키 이미지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려는 노력이 느껴집니다.

다른 리큐르와 섞어 마시기에도 좋아 칵테일 제조용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이렇게 제주 느린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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