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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 강원 오죽헌

다섯. 오죽헌

최치운은 고향인 강릉에 오죽헌 짓고 최치원의 아들 최응현이 오죽헌 물려받고 최응현은 이사온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오죽헌도 물려준다.

이사온은 외동딸을 신명화에게 시집보내고 신명화 둘째 딸이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둘째 딸의 아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고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고 오죽헌과 전답을 주었다.

권처균이 별당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주변이 온통 까마귀 같은 검은 대나무가 무성해래 권처균은 자신의 호를 오죽헌으로 작명하고 이 별당에 오죽헌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최치운(1390-1440).

본관 강릉.

19세에 과거 예비시험인 진사시 합격하고

28세에 정시과거인 식년문과 합격한뒤 벼슬이 공조참판(지금의 건교부 차관)에 이른다.  

신 師任堂(사임당: 주나라 때 문왕을 임신한 태임太任은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고, 입으로는 거만한 소리를 내지 않았걸랑. 기원전에 이미 태교를 한 거야. 그래 신 씨는 태임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이라는 뜻)

본명은 인선. 본관 황해도 평산. 조선시대 때 302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 명문가.  

출산을 위해 고향집 오죽헌을 찾은 신사임당 꿈에 용이 나타났다.

그래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 이율곡(본가가 파주시 율곡리)의 이름은 현룡見龍이 된다.  

13세에 과거 예비시험인 진사시 장원(수석)한 이후 29세에 정시과거인 식년문과에 합격할 때 까지 9번의 과거시험에서 연속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등극한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율곡이 열한 살 때 아버지가 큰 병을 앓던 중 꿈을 꾸었는데, 백발노인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東國 중국의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유(大儒 위대한 선비)이니, 이름을 '구슬 옥玉'변에 '귀 이耳'자를 붙여 짓도록 하라."


그래 본명은 현룡에서 이珥로 개명한다.  

모친이 위독하여 마포에서 배를 타고 강릉을 향해 출발하지만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모친 별세.

3년 시묘(侍墓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삶)에 들어간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죽헌을 찾았다.

1963년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된 오죽헌이 무너지게 생겼다.

돌보는 이도 없고. 본채는 간 데 없고 세칸짜리 오죽헌 달랑 한 채만 버티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오죽헌 정화사업 착수하여 신사임당의 후손으로부터 오죽헌 사들이고 인근 땅 1만 3천 평도 추가로 매입한다.

오죽헌 옆에 콘크리트로 이율곡의 사당 文成(문성: 조선 제 16대 왕 인조가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 이율곡선생은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사 대충 건립한다.

성사 현판은 박통이 썼다.

오죽헌 현판은 권상하씨가 썼고.

건물에는 왜 헌軒자를 붙이는것은 아름답고 활짝 트인 경관이 좋은 높은 곳에 지어진 게 꼭 옛 수레를 닮아서다.

1998년 강릉시는 다행히 오죽헌 뒤쪽으로 안채와 사랑채 목구조로 제대로 복원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안쪽에 커다란 역시 콘크리트로 목구조를 카피한 못생긴 건물이 보인다. 오죽헌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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