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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2.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V 전라 醉歌亭 취가정

다섯. 담양의 삼승一洞之三勝과 溪山風流 계산풍류 05

1592년 4월 14일 왜병 20만 대군 부산 상륙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4월 30일 선조는 종묘의 위패만 간신히 챙겨 의주로 피란길에 오른다. 

평안북도 영변 도착하자 선조를 호종하던 광해군은 불안해 分朝분조(전시 광해군의 임시 조정)를 운영한다.

담양에 도착한 광해를 담양부사 이경린이 맞이하고 고경명장군을 찾지만 전사한 후다.


26세의 괴력의 청년 김덕령.

본관은 광산. 

스승은 성혼선생. 

전시 중이라 무과시험도 안 보고 단숨에 정6품 형조좌량에 재수한다.

의병 5천을 이끌고 김덕령은 철퇴 양 허리에 차고 출전하고 여기에 사명당 유정이 스님 2천명 끌고 도착한다. 왜군 퇴각.   

김덕령이 수하들을 이끌고 장문포사령부 이순신 장군을 찾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상륙작전 감행하여 왜군 전멸시킨다. 

이제 김덕령의 벼슬은 선전관宣傳官에 오른다. 당상관.

전라도 총사령관 윤근수의 하인이 주인 빽 믿고 까불다 김덕령에게 죽였다. 

윤근수의 눈밖에 나서 형장에 끌려 왔지만 어명으로 목숨 부지하고 다시 전선으로 투입된다. 

1596년 부여군 홍산면에서 농민을 못 살게 구는 왕실을 업어 버리겠다고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토벌군을 끌고 남원시 운봉쯤 왔는데 이몽학 사살되고 반란군 섬멸됨을 듣고 진주로 철군한다.

악심을 품고 있던 윤근수사령관이 부사령관 신경행을 불러 권율장군에게 탄원서를 넣었다. 

김덕령이 허락 없이 철군한 걸로 보아 이몽학의 끄나풀임이 확실하다. 

한양으로 압송되고 감옥에서 맞아 죽었다. 

29세. 

부인은 투신자살하고 외아들은 본관을 용안으로 바꾸고 평안남도로 몸을 숨겼다.  

유언은 이렇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1661년 신원(伸寃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줌). 

1678년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고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받는다. 

1788년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왕이 충장공(忠壯公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시호를 내렸다. 

1890년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이 장군의 덕을 기리며 무등산 자락 자미탄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정자 건립한다. 

문헌을 찾아보니 권석주의 꿈에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셔서 醉時歌취시가(취해서 부르는 노래)를 읇으셨다고 정자이름을 짓는다. 


한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그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맑은 임금 받들고자. 


醉歌亭취가정.  

한국동란 때 소실하여 1955년 중건했다. 

소나무와 기둥이 구분도 안 되고 자연이 건축이고 건축이 자연이다.

대한민국에 들어와 중건한 거라 정자에 왕궁에서만 쓸 수 있는 원기둥을 썼다. 

냇가 건너편에 식영정 보이는데, 이 정자는 한을 풀어드리려고 김덕령 장군의 고향인 무등산 자락 석저촌을 바라보느라 냇가를 안 바라보고 벌판을 바라본다. 

1975년 광주시 북구 금곡동에 사당 충장사 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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