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th_Shelly Kagan
죽음이라는 주제로 써내려간 책 한권에 빠져들며 지금껏 봐 왔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현실적인 모습을 묘사하기보다 형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말 하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원어, Advice for Future Corpses 미래의 송장들에게 전하는 조언 (and Those Who Love Them)에서 읽혀지듯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다못해 책의 부록 페이지에는 독자 여러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죽음 계획서와 좋은 죽음을 위한 제도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정도이니…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고 있지만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애써 탐구하려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죽음을 피해야 할 무언가로 여기는 전통적인 태도 때문에 그렇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쩌면 섬뜩할정도로 현실적인 묘사로 2시간만에 완독하고나니 긴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책장에서 10년 전의 책을 꺼내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 몇 해 동안 한국사회를 아프게 했던 연쇄적인 자살, 혹은 사회적 타살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죽음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well-dying(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 품위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라 일컫는 아름답게 준비된 죽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며 2012년에 출판된 Shelly Kagan 셀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는 출판 이후 10년이 흐르는 시간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에 수식어처럼 따라 붙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배제한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인 'Death 죽음’은 방대한 철학사를 아우르며 철저하게 논리와 이성으로서만 죽음과 삶의 본질을 고찰하며 어렵고 묵직한 주제를 토크쇼 사회자에 비견되는 특유의 유머감각과 입담으로 흥미롭게 풀어갑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방대한 철학사를 다루면서도 난해한 철학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만의 교수법은 “대중철학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죠.
예일대 철학교수 셸리 케이건은 Death class(죽음 강의)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정작 포커스는 ‘살아있는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케이건 교수는 사후세계를 이야기 하는 대신 ‘나’라는 것은 살과 뼈, 피로 이뤄진 덩어리인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뇌가 멈추는것, 고장난 기계가 되는것, 점차로 부식할 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죽음이라고 야속한 정의로 그의 이야기를 열어 갑니다.
놀랍게도 케이건은 유대교도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진짜 알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진정 끝이냐?’가 아닐까요?
인간 역사를 통틀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번 생이 끝나고 어딘가에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고 사후세계를 믿고 또 말합니다.
살아있을 때 모습대로 천국의 왕국에 간다든지 아니면 환생할 거라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안도를 얻습니다.
케이건 교수는 이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죽음은 생이 끝나는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살과 뼈, 피로 이뤄진 덩어리인 몸(나)는 뇌가 망가지면 우리는 멈추고 더 이상 다른 방식의 생각하는 무엇으로 진행될 수 없는 고장난 기계가 되니까, 점차로 부식할 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이것이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답 은 자명하다.
당연히 “아니오”다.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묻는 것은 삶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삶이 남아 있는 것인지를 묻는 ‘자기모순적’ 질문이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다. 이는 마치 음식을 다 먹고 나서 아직 접시에 음식이 남았는지 묻는 격이다.
또한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아직도 영화가 더 남았는지 묻는 셈이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1장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중에서
Dualism 이원론(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져 있다)과 Physicalism 물리주의(인간은 육체로만 이뤄져 있다)을 비교하고 Phaidon 파이돈(영혼불사)의 논리적 오류를 해명하고 육체와 정신은 각각 다른 존재라는 데카르트를 반박하며 이성으로 증명하기 매우 까다로운 존재 앞에서 쉽게 심리적 믿음을 택하게 되는 현상을 비판합니다.
여기에 영혼, 육체, 인격이라는 인간 정체성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살펴보고, ‘시공간 벌레(space-time worm)’ 로 부터 시계 수리공의 비유등 다양한 일상의 사례를 통해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케이건 교수는 8장까지 신중하고도 차분하게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인간의 본질이며 모든 것임을, 그럼에도 왜 우리가 기존에 알던 존엄한 인간의 이상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논증합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예로 들어 죽음에 임박하는 순간에도 죽음을 부인하고자 하는 인간 심리의 이중성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충격으로서 다가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 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에서 적당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넘어지면서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그 상처 는 계속해서 악화되다가 결국 죽음으로까지 이르고 만다.
여기서 놀라운 장면은 이반 일리치가 스스로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지는 순간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 은, 사람들 대부분 이반 일리치와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사실 우리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 8장 죽음에 관한 두 가지 놀라운 주장 중에서
그렇게 논의가 진행되다가 9장 '죽음은 왜 나쁜 것인가'에서 한 논증이 등장합니다.
‘죽음은 두렵고 나쁜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케이건 교수는 “삶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을 앗아가기 때문에 나쁘다”는 Deprivation account 박탈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며 이에 대해 ‘죽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게 아니다’라는 에피쿠로스(Epicurus)의 입장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존재해야 뭔가가 우리에게 좋거나 나쁠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가 성립 가능한데, 저자는 그것을 '존재 요건'이라고 부르는데 이 존재 요건을 근본적으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에피쿠로스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따라서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 상식에 부합하지 않지만 존재 요건을 부인한다면 현재 존재하는 사람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죽음'으로 인해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고 합니.
이론적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죄책감과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 9장 죽음은 나쁜 것인가 중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억지로 피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일부러 달려가지도 말아야 한다고, 설령 삶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장의 자살의 결론이 죄악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교수가 비판하던 기독교 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뜨거운 감자인 안락사 논쟁에서 안락사 반대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몇 가지의 유보 조건을 둔 후 결국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은 그래서일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심사숙고했고,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으며, 충분한 정보와 조언을 얻었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고 우리가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14장 자살, 죽음의 선택인가 삶의 포기인가 중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게됩니다.
죽음에 대한 개념적 질문에서 시작해, 죽음은 나쁜 것인가?를 시작으로
영생은 좋은 것인가?,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인가?,
우리는 왜 경험하지도 못한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은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잠시 지구상에 머물다 사라지는 우리 삶이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이며 행운인지, 그래서 어떤 게 잘 사는 건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자신의 물리주의 입장을 열심히 피력하지만 반대자들 의견도 경청하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정해진 답은 없지만 죽음을 직시하며 다양한 주장들을 놓고 스스로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나름의 답을 찾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케이건교수가 의도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