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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un 26. 2023

 육지것의 제주 이야기 I 인문 돌하르방

한라산, 올레길, 흑돼지, 회, 감귤...

제주,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들어서면 제주를 상징하는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화된 수 많은 제주들... 한때 돌하르방 열풍이 불어닥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관광 상품가운데 전세계로 가장 많이 팔려나간 제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돌하르방이 아닐까요. 

실제로 제주의 대표 상징물에 대해 조사를 하면 도민 또는 관광객들은 돌하르방을 1순위로 떠올리곤 했습니다.

돌하르방이 제주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 기념품은 물론이고 돌하르방의 이미지를 이용한 상품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져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4년 제주에서 열린 1만1천500여명이 참가한 전국소년체전 당시 토산품으로 지정한 제주의 50종 131개 품목 중 돌하르방 기념품 1만여 개가 팔렸는데 당시 제작자에 따라 멋대로 기념품이 제작되는 문제가 발생하자 1987년에는 제주도에서 제주시 삼성혈 입구 동쪽에 세워진 돌하르방과 KBS 제주방송국 정문,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 남문, 대정읍 인성리의 돌하르방 등 4기를 표준형으로 정해 공예품·기념상품·광고·전시물 등의 제작 기준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기준에 상관없이 다양한 형태의 돌하르방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등 중요한 손님이 제주를 찾을 때마다 돌하르방이 선물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돌하르방 특허를 둘러싼 논란으로 제주도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는데 1993년 인천의 한 업자가 돌하르방 모습을 상표로 특허청에 등록, 독점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수십년 전부터 돌하르방 형상을 이용해 토산품을 만들고 석재 가공업을 해 온 사람들이 당장 일을 그만둬야 할 상황까지 놓이기도 했습니다.

논란은 제주도와 도의회 차원에서 국무총리에 돌하르방 상표등록 취소를 건의하는 등 사회문제로 불거지자 업자가 스스로 등록 취소를 하면서 일단락되었죠.

돌하르방이라는 명칭도 따지고 보면 붙여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제주시에서 가장 통용되던 명칭으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는 우석목(우성목), 성읍리(정의현), 대정읍(대정현)에서 가장 통용되던 명칭이나 역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는 무석목(무성목), 제주 방언에 뿔이 닳아진 소를 “두룽머리”라고 하는데 돌하르방의 머리모양이 닳아진 소의 뿔과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두룽머리, 성읍리(정의현)에서 사용된 용어로 육지의 벅수와 관련성 있는 벅수머리, 목사 김몽규가 옹중석을 성문 앞에 세웠다는 기록에서 인용된 것으로 유학자들 사이에서 불리던 옹중석, 이외에도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과 뒤섞여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주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던 1971년에 제주문화재 위원회에 의해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제주의 지식인이었던 김석익이 쓴 편년체 역사저술서 탐라기년에 따르면 돌하르방은 조선 영조 30년(서기 1754년) 김몽규 목사가 세웠다고 합니다. 


甲戌三十年 淸乾隆十九年 갑술삼십년 청건륭십구년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 목사김몽규설옹중석어성문외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서는 진시황 때의 고사처럼 성문 앞에 세운 석상이나 무덤앞에 세운 석상, 길가에 세운 석장승, 풍수상의 이유로 세운 석상 등을 모두 옹중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놀랍게도 돌하르방은 실존 모델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중국 진시황 때 거인장사로 이름을 날리며 흉노족 등 이민족을 물리친 완옹중(阮翁仲)이 그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옹중翁仲은 중국 진시황 때 인물인 완옹중阮翁仲을 말하는데, 후에 동상銅像이나 석상石像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죠.

완옹중은 진시황때의 용맹스러운 장수로 그 명성이 흉노에까지 떨쳤고 완옹중이 죽자 진시황은 그의 형상을 구리로 만들어 성문 밖에 세워 두었는데 완옹중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흉노족들이 처들어오다 성문 앞의 완옹중 상을 보고 그대로 도망갔다고 한 이후로 진나라 사람들은 완옹중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그의 형상을 구리나 돌로 만들어 궁궐이나 관아 앞에 세우게 되었다고 하합니다. 

1754년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세웠다는 옹중석은 완옹중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돌하르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주 지식인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모임(계)인 담수계(淡水契)가 1953년 펴낸 『증보탐라지』에는 돌하르방이 제주읍성의 동, 서, 남 등 삼문 밖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에 단 한 줄 언급된 이 기록만으로 돌하르방의 기원을 결정짓는 것은 성급할 수 있습니다.

제주 돌하르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돌하르방이 외래의 요소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견해와 제주의 자생적인 조형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외래 기원설은 북방기원설(몽고기원), 남방기원설(발리섬기원)과 육지전래설(벅수전래)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석장승과 조형적 영향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자생설을 뒷받침하는 듯 하지만, 이보다 앞서 조성된 대정현과 정의현 돌하르방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자생설의 맹점이 있습니다.

북방설은 13∼14세기 몽골 초원에 조성된 '훈촐로' 석인상의 모습이 놀랍게도 돌하르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는 몽골의 한반도 지배 시기에 닿아있어 15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정현과 정의현 돌하르방의 기원을 설명할 수도 있어 어쩌면 가장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지난 2014년 10월 제주 돌하르방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중국 요(遼)나라(907~1125년) 시대 석인상(石人像)이 만주에서 발견돼 돌하르방의 기원과 관련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적도 해류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남미와 동남아 지역의 석조 문화가 전파됐다는 남방설 역시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정설을 이야기 할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원조'라고 불릴 수 있는 유서 있는 돌하르방은 모두 47기로 추정되는데,

옛 제주목(현 제주시내)에 23기, 대정현의 소재지(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인성리, 안성리 등) 일대에 12기, 정의현(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등) 일대 12기 등 모두 47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가운데 제주자치도 민속문화재(2호, 1971년 8월 26일 지정)로 지정된 것은 제주도 밖으로 반출된 2기를 제외한 45기입니다. 

돌하르방들은 최초 성을 중심으로 성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흡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장승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제주목 출신 돌하르방들 중 상당 수는 현재 도시 개발의 여파 등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제주목(제주시)에 있는 돌하르방의 경우 대정현(서귀포시 대정읍)과 정의현(서귀포시 표선면)과 비교해 체구가 크고 얼굴의 음각선이 깊어 강한 느낌을 갖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조형미가 뛰어난 점도 특징으로 꼽힙니다.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제주목의 돌하르방입니다. 

이에 반해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아담하고 소박한 맛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평균 신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제주목 돌하르방은 평균 181.6cm가량이고, 정의현과 대정현 돌하르방은 각각 141.4cm, 136.2cm로 차이가 납니다. 

또 정의현 돌하르방은 주먹을 쥔 듯한 손 모양을 띠는 반면, 대정현 돌하르방은 손바닥을 편 모양새입니다. 

제주목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에는 받침석이 있는 반면, 대정현의 돌하르방에서는 받침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르고 보면 비슷하지만 알고 본다면 그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죠. 

관덕정 앞 민속문화재 2-1,2
관덕정 뒤 민속문화재 2-5,6
제주시내 돌하르방 


관덕정 4기(1,2,5,6), 목관아2기(19,20)

관덕정에는 네 귀퉁이에 각 하나씩 네 개의 돌하르방이 있습니다.

1호와 2호, 정면의 2기와 5호와 6호, 후면의 2기.

이 돌하르방은 서문 밖 돌하르방 8기는 일제 말기에 이곳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목관아내의 2기(19,20)는 남문 밖 8기 중 2기 입니다.

정원루(定遠樓)가 세워져 있던 남문지는 제주시 이도1동 1494-1번지 일대로서, 남문로터리가 크게 들어서면서 성문 앞의 옹성굽이 길목은 거의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남문 밖 돌하르방의 경우도 위치 이동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1954년 담수계(淡水契)가 펴낸 증보탐라지의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남문 밖 8기 돌하르방 가운데 4기는 삼성혈 입구 및 관덕정 앞으로 2기씩 옮겨졌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로 또 옮겨졌고 옛 제주여고(현 제주KAL호텔)에 있던 2기는 제주공항으로 이설했다가 최근 제주목관아 경내로 다시 옮겨진 것입니다.

제주목관아 영주협당 민속문화재 2-19, 20
자연사 박물관 앞 민속문화재 2-3,4

제주시 돌하르방 자연사박물관(3,4)

자연사 박물관 입구의 2기는 서문밖 8기 중 관덕정으로 옮겨진 6기가 옮겨졌고 그 후 80년대 중반 4기를 빼고 2기만 옮겨진것입니다.


삼성혈(7,8,9,10)

삼성혈 입구에서 건시문에 이르는 골목에 4기의 돌하르방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성혈 입구에 있는 돌하르방 2기는 제주성 남문(정원루) 입구에 세워져 있던 것이 성문의 훼손과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건시문 앞 2기는 산지천변 인근에 있던 삼천서당이 폐교되면서 명승호텔 앞으로 세워졌고, 1963년 현재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혈 입구 민속문화재 2-7, 8
삼성혈 건시문 앞 민속문화재 2-9, 10

제주대학박물관입구(11,12,13,14)

성문 앞쪽 약 35m 지점에 세워진 아래 사진 속의 돌하르방 4기 가운데 2기는 서울로 옮겨져 경복궁 민속박물관내에 생뚱하게 서있고 나머지 2기는 용담동 옛 제주대학으로 옮겼다가 1980년 제주대학교 아라캠퍼스가 신축돼 제주대학교 정문으로 옮겨졌으며, 최근에는 제주대박물관 앞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이곳의 4기 돌하르방 기단석에는 ┑,┏ , ● 형태의 구멍이 파여 있는데, 모두 정낭을 꽂아 넣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민속문화재 2-11, 12, 13, 14

시청(15,16)

동문 밖 8기 중 도청에서 지금의 시청 앞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제주시청 민속문화재 2-15, 16

제주KBS(17,18)

KBS 제주방송총국 입구에 2기의 돌 하르방이 있는데 이는 신축 이전하기전, 연동 구 청사에서 2014년 10월 28일 이전한것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 45기 중 17, 18호로 문 밖에 세워진 8기의 돌하르방 중 바깥쪽 옹성굽이에 있던 4기 돌하르방이 1966년 제주민속박물관으로 2기가 옮겨졌다가 제주KBS방송국으로 이설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2기는 지금 제주시청에 있는데 이 4기를 직접 마차를 이끌고서 돌하르방을 옮겼던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의 전언에 따르면 4기 모두 기단석을 함께 옮기지 못해서 지금 것은 나중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제주시 돌하르방 돌문화공원(21)

돌문화박물관의 1기는 새로 만든 돌하르방 외부 전시공간에 함께 전시된것으로 1963년 조사 당시 허리가 부러진 채 유일하게 원래 자리에 남아있던 1기는 탐라목석원을 거쳐 현재 제주돌문화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와 함께 있던 1기는 분실돼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왼쪽 제주KBS 민속문화재 2-17, 18 오른쪽 돌문화공원 2-21
대정읍성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 인성, 보성리 일대에 자리한 대정현성 3문 앞에는 각각 4기씩 돌하르방 12기가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돌하르방 위치가 많이 옮겨져서 원형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최근 그 자리를 찾았네요.

덕분에 움직임이 짧아졌습니다.

돌하르방의 규모는 제주읍성과 정의현성의 넓이나 규모에 비해 가장 적고,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원래 대정현성은 1418년(태종 18) 처음 축조할 때 제주읍성이나 정의현성과 달리 동서남북 4문을 만들었으나, 북문은 나중에 폐쇄시켜 그 후로는 3문만 남아있습니다.

정의읍성 서문지 민속문화재 2-22, 23, 24, 25

대정현성과 정의현성의 돌하르방 조성 시기가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1754년이나 그 이후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현성의 축조 등을 보면 대정현성 돌하르방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특히 대정현성 돌하르방 중 서문지 돌하르방(민속자료 2-34호)에서 외래적 요소가 나타난다는 학계의 주장은 북방전래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돌하르방들이 15세기 전반기 대정현성 성문 앞으로 옮겨가며 성문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의읍성 남문지 민속문화재 2-26, 27, 28, 29

미세한 차이점을 찾아본다면,

제주시에 있는 돌하르방의 경우 대정과 성읍과 비교해 체구가 크고 얼굴의 음각선이 깊어 강한 느낌을 가지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조형미가 뛰어나 흔히 생각하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제주시의 돌하르방입니다. 

이에 반해 대정현과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아담하고 소박한데,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평균 181.6cm가량이고, 성읍은 141.4cm, 대정은 136.2cm입니다.

형태로 본다면 성읍 돌하르방은 주먹을 쥔 듯한 손 모양을 띠는 반면, 대정 돌하르방은 손바닥을 편 모양새입니다. 

제주시와 성읍의 돌하르방에는 받침석이 있는 반면, 대정현의 돌하르방에서는 받침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정의읍성 동문지 민속문화재 2-30, 31, 32, 33
성읍마을


정의읍성 돌하르방은 일찍부터 성읍민속마을이 지정되면서 성문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돌하르방의 모양은은 눈꼬리가 올라가 있고 제주에 널린 현무암이 가진 재질을 살려서 투박하지만 기하학적인 형태표현이 다른 지역 돌하르방과 다르게 보여집니다. 

정의현성이 있던 성읍 출신들도 백하르방이라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서 민간에서는 하르방이란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정읍성 서문지 민속문화재 2-34, 35, 36, 37

제주는 1만8000의 신들의 땅인데도 돌하르방은 신이 갖는 내력도 없고 숭배의 기능도 없습니다.  

무인을 상징하는 왼손이 위로 올라간 돌하르방과 문인을 상징하는 오른손이 위로 올라간 돌하르방이 대칭을 이루게 세워놓은 것으로 보아, 유교문명의 전도사였던 조선시대 관아의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 만들어진 곳은 대정현으로 유배인들이 제주에 들어오는 포구인 화북포구로 들어오는데, 이곳에서 가장 먼 곳이죠. 

유배형은 거리가 중요해서 화북포구에서 대정현까지 구불구불 걸어서 거리를 맞췄기 때문입니다. 

대정현감은 이름난 유학자들인 유배인들에게서 성문밖 수문장을 세우도록 조언을 받았고, 그래서 가장 먼저 이곳에 돌하르방이 성의 수호신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정읍성 남문지 민속문화재 2-38, 39, 40, 41

대정현의 석수는 당시 제주에서 가장 이름난 석상인 복신미륵을 참조하여 독특한 돌하르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것을 본 정의현감도 뒤늦게 돌하르방을 만들어서 성문 앞에 세웠을 것이고 그래서 크기가 조금 커졌습니다.

대정현감과 정의현감은 제주출신이었기에  제주사람들의 정서에 보다 가까운 돌하르방의 제작을 했을 것이지만 제주목사인 김몽규는 외지인으로 보다 더 옹중석에 가까운 형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 모델로 돌장승을 제시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현감이나 대정현감의 상관인 제주목사의 격에 맞게 키가 큰 돌하르방이 제작되었고, 개수도 두배로 늘려서 세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대정읍성 동문지 민속문화재 2-42, 43, 44, 45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기 이전 1970~80년대 제주는 국내에서 가장 각광 받는 신혼여행지였습니다.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따라 관광지 마다 신혼부부가 줄을 서서 코를 만지며 사진을 찍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돌하르방의 코를 빻아 가루를 내서 먹으면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도 하며, 이와는 정반대로 임신한 여인이 가루를 내서 먹으면 태(胎)가 지워진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신들의 섬 제주에서 내력도 숭배의 기능도 없지만 그럼에도 돌하르방이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서 자리잡고, 그것에 대해 제주사람들조차 거부감이 없는것은 무서운 옹중석이나 장승과 달리 손주를 잔뜩 꾸짖을 듯하면서도 그 속에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할아버지 모습이 느껴지며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은 듯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돌하르방은 이제 흉년과 전염병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을 농림축산식품부와 보건복지부에 넘겨주고 사람들로부터는 사랑만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로 이민간 나머지 2기의 무사 귀환(?)으로 성공한 하르방의 복원이 완성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내 미지정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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