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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문 CCⅨ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유발 하라리

by Architect Y

차일피일 미루다 깜박하고, 한참을 지나서 조지프 헨드릭스 Joseph Henrich의 위어드 WEIRD를 읽고나니 생각나서 뒤적이다보니 이 책의 후기를 정리하다 말았네요.

그래, 위어드 올리기 전에 Homo Deus 호모데우스를 먼저 정리해 봅니다.

라틴어로 호모(Homo)는 인류 또는 인간, 데우스(Deus)는 신을 뜻합니다.

전작, 사피엔스에서 나는 인간이 가진 신, 인권, 국가 또는 돈에 대한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 덕분에 이 행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면 호모 데우스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신화들이 혁명적인 신기술과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에서 일어나게되는 현재의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책으로 전율이 느껴지는 글들 사이를 걷게 됩니다.

2017년 5월 한국에 정식 번역 및 출간되어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것은 유발 하라리만의 이야기 전개 방식과 책 속에서 사용된 논리의 명확함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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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New Human Agenda
인류의 새로운 의제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늙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 테러범,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다.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가뭄, 에볼라,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죽기보다 맥도날드에서 폭식해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 인류의 새로운 의제 p.15


20세기가 시작되어질 즈음,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것을 생각하게됩니다.

물론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들은 이제 자연의 불가해하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떤 신이나 성자에게 이 문제들에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고, 대개는 잘 막아냅니다.

눈여겨볼 만한 실패 사례들도 여전히 있지만, 그런 실패의 순간에도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불완전한 세계의 작동원리’라거나 ‘신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아, 역병, 전쟁이 발생하면 우리는 누군가 잘못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다음번에는 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 그런 재앙들이 확실히 점점 줄어듭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늙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 테러범,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가뭄, 에볼라,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죽기보다 맥도날드에서 폭식해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으로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는 것은 무엇보다 노화, 죽음,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런 능력을 가졌을 때 그 능력으로 우리가 그밖에 무슨 일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새로운 의제를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은데그것은 바로 ‘신성 divinity’을 획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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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생명공학으로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현명한 대답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음을 지닌 존재가 생명공학으로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는 쓸 만한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은 생명공학으로 자신의 마음을 재설계할 것이고,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현재의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이다.
- 인류의 새로운 의제 p.73~74


이 책의 제목인 호모 데우스에서 Homo 호모는 사람 속(屬, Genus)을 뜻합니다.

Deus 데우스는 신을 뜻하는 말인데, 저자는 기아와 역병, 전쟁을 극복한 21세기 인류는 다음 목표로 행복과 불멸, 신성을 추구할 것이라 예측하고 그렇게 될 때 인류는 ‘호모 데우스’, 신이 된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부에서는 무엇이 우리 종을 이처럼 특별하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와 여타 동물들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미래에 대한 책에서 왜 동물에게 이토록 주목하는지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동료인 동물들에서 이 논의를 시작하지 않고는 인류의 본성과 미래를 진지하게 논할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물입니다.

또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려고 시도하는 시점에 우리의 기원을 기억하는 것은 두 배로 중요합니다.

동물로서의 우리 과거, 또는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를 무시하고는 신이 된 우리의 미래를 살펴볼 수 없게 되는것입니다.

2부에서는 1부의 결론을 토대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난 천 년 동안 창조한 기이한 세계와 우리를 현재의 교차로로 데려온 길을 살펴봅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본주의의 몰락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초인간’의 도래와 인본주의의 퇴색, 데이터교의 지배 등 그의 예견은 섬뜩하고도 논쟁적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모든 의미와 권위가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인본주의 신조를 신봉하게 되었을까요?



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HOMO SAPIENS CONQUERS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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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Anthropocene
인류세

과학자들은 우리 행성의 역사를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 플라이오세 Pliocene, 마이오세 Miocene 같은 시대로 구분합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는 홀로세 Holocene(약 1만년 전~현재)에 살고 있지만 몇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생태계의 독보적 변인이 되었기 때문에 지난 7만 년을 인류세, 즉 인류의 시대로 부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농업은 대량 멸종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농업이 지구상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생물인 가축들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대형 동물의 90퍼센트가 가축화되었죠.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화된 동물들의 운명을 특히 사납게 만드는 것은 단지 죽는 방식이 아니라, 그 동물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농장주들은 충분한 먹이를 주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고,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인공수정을 하며 암퇘지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암퇘지는 주변을 탐색할 필요도, 다른 돼지들과 어울릴 필요도, 새끼와 유대를 형성할 필요도, 심지어 걸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돼지의 주관적 관점에서 보면 그 돼지는 여전히 이 모든 것에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고, 그런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생식 우리에 갇힌 암퇘지들은 흔히 극심한 좌절과 지독한 절망을 번갈아 드러냅니다.

생존과 번식에는 불필요하다 해도, 그 동물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수천 세대 전에 형성된 필요를 계속 느낀다는 것, 이것이 진화심리학이 주는 교훈이죠.


돼지 같은 동물들이 실제로 주관적 필요와 감각, 감정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며 혹시 우리가 동물의 인간화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돼지에게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화가 아라 ‘포유류화’죠.

감정은 인간만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 성질입니다.(더 나아가 모든 조류와 몇몇 파충류, 심지어 어류도 감정을 느낀다).


근대 과학과 산업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납니다.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동식물을 침묵시키고, 애니미즘이라는 장대한 경극을 인간과 신의 대화로 바꾸었데 과학혁명을 통해 신도 침묵시켰죠.

인간이라는 1인극의 세계로 바꾼것입니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습니다.


생명공학, 나노기술, 그밖에 과학의 열매들이 무르익으면, 호모 사피엔스는 신 같은 힘을 얻어 다시 원점인 성경의 선악과로 돌아갈 것이다. 원시시대 수렵채집인들은 또 하나의 동물 종에 불과했다. 농부들은 자신들을 창조의 정점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우리를 신으로 업그레이드 할 것이다.

- 1.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인류세 p.141


3. The Human Spark
인간의 광휘(光輝;눈부시게 훌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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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 역시 동물이죠.

유발 하라리는 이 부분을 상기 시키면서 동물들의 번식만 중요시 할것이 아니라 그들 개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하며 인간의 우월성을 정당화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가진 이 특별한 광휘(원어에서는 Spark)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일신교의 대답은 사피엔스만이 불멸의 영혼을 가진다는 것이지만 최근의 과학적 발견은 이 일신론적 신화와 정면충돌합니다.

물론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실험들은 신화의 한 부분인 ‘동물들은 영혼이 없다’는 일신론적 종교들의 믿음을 확인시켜주지만 안타깝게도 그 실험은 이 일신론 신화의 훨씬 더 중요한 두 번째 부분, 인간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훼손합니다.

과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들을 수만 가지 기상천외한 실험에 참여시켜 그들의 심장과 뇌를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폈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마법의 광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피엔스가 돼지와 달리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는것이죠.


인간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혼과는 매우 다르죠.

마음은 고통, 쾌락, 분노, 사랑 같은 주관적 경험의 흐름으로 불멸의 영혼과 달리 마음은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항상 변하며, 영구적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마음의 흐름을 구성하는 의식적 경험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감각과 욕망입니다.

그러면 동물은 어떨까요,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어 그들도 주관적인 경험을 할까요?

그렇지 않다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에게 일을 시켜도 괜찮을까요?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생명과학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포유류와 조류, 적어도 일부 파충류와 어류가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동물들도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자들은 달리고, 뛰어오르고, 할퀴고 물 수 있다. 하지만 은행계좌를 만들거나 소송을 제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소송을 제기할 줄 아는 은행가가 사바나에서 가장 포악한 사자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을 지닌다.

- 1.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인간의 광휘 p.213


인간의 우월성을 방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쥐, 개, 여타 동물들이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달리 자의식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意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 自意識;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나 자신의 행동, 성격 따위에 대하여 깨닫는 일)

이러한 생각은 흔하지만 분명하게 이해하기 힘들죠.

배고픔을 느낀 개가 고기 한 점을 집는 것은 자기가 먹기 위해서이지 다른 개에게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에게 이웃 개들이 오줌을 싸 놓은 나무 냄새를 맡게 하면, 개는 그 냄새가 자기 오줌 냄새인지 이웃집의 귀여운 래브라도의 것인지, 아니면 어떤 낯선 개의 것인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렇다면 개에게 자의식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분명 다른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돌촉을 붙인 창으로 매머드를 사냥하던 인류가 2만 년만에 우주선으로 태양계를 탐사하게 된 것은 더 능란한 손재주나 더 큰 뇌(실제로 우리 뇌가 그들의 뇌보다 더 작은 듯하다)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을 정복한 이유는 불멸의 영혼이나 어떤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 아니라 바로 이 구체적 능력 덕분이죠.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HOMO SAPIENS GIVES MEANING TO THE WORLD

인간이 대규모 협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피엔스>에서도 밝혔듯이 상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부에서는 1부의 결론을 토대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난 천 년 동안 창조한 세계와 우리를 현재로 데려온 길을 살펴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모든 의미와 권위가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인본주의 신조를 믿게 되었을까요?

이 신조의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이 신조는 어떻게 우리의 일상과 예술 그리고 우리의 가장 은밀한 욕망을 만들어냈을까요?


4. The Storytellers
스토리텔러


인간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사실 허구의 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약 6,000년 전 고대 수메르에 생겨난 최초의 도시들에서 사원은 숭배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이었습니다.

수메르의 신들은 현대의 상표 및 기업과 유사한 기능을 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신들이 실제로 사업을 운영한 것은 아니고 신들은 인간의 상상 속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상의 일은 사원에 있는 성직자들이 관리했습니다(살과 피를 지닌 인간을 고용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업무를 맡기는 것과 같죠).

하지만 신들의 재산과 힘이 점점 커지자 성직자들이 감당할 수 없게되자, 약 5,000년 전 수메르인들이 문자와 돈을 발명했을 때, 이 장애물이 마침내 사라집니다.

문자와 돈 덕분에 수십만 명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복잡한 관료제를 조직하고, 거대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이야기는 인간 뇌의 한정된 용량에 의존했고 사람의 머리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복잡한 이야기는 지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생기고부터 인간은 무척이나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었고, 그 이야기들은 인간의 뇌가 아니라 돌판과 파피루스에 저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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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기록의 힘은 성경의 출현으로 정점에 이르릅니다.

성직자들은 신의 재산목록뿐 아니라 신의 행동, 계명, 비밀 들까지 기록했고 그 결과물인 성경은 이른바 실제를 기술한 총체로 불렸고, 많은 세대의 학자들이 성경, 코란, 베다를 넘기며 답을 찾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종교계는 모든 질문의 답이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도록 법원, 정부, 기업을 압박합니다.

성경은 실제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사람들을 오도할 때조차 수천 년 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허구는 우리의 협력을 돕고 그 대가로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이 허구가 협력의 목표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우 정교한 협력 시스템을 가졌다 해도, 그 시스템은 정작 허구적 실체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를 검토할 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제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실체가 실제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아주 간단히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보면 됩니다.

제우스의 사원을 불태워도 제우스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유로화가 가치를 잃어도 유로화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은행이 파산해도 은행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나라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듯 이런 경우 고통은 단지 은유죠.

반면,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 그는 실제로 고통을 느끼고 굶주린 농부는 먹을 것이 전혀 없을 때 고통을 느끼며 갓 태어난 송아지와 떼어놓으면 어미 소는 고통을 느끼는데 이런 경우 고통은 실제죠.

그렇다고 허구가 나쁜다고 할수 없을뿐 아니라 꼭 필요하기까지 합니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죠.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하며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할까요?


허구적 신화에 의존하지 않고는 대중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허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실제를 고집한다면 그를 따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 2.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스토리텔러 p.237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상충된듯한 과학과 종교가 어떻게 협력관계가 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5. The Odd Couple
뜻밖의 한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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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으로 그리는 것은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론상으로 과학과 종교는 둘 다 다른 무엇보다 진리에 관심을 두지만, 각기 다른 진리를 지지하므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도 종교도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둘은 쉽게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협력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고 과학은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하다보니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인것입니다.

즉,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종교 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과정으로 보는것이 훨신 더 정확한 관점일 것입니다.


과학이 부상함에 따라 적어도 몇몇 신화와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21세기 난제들을 직시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난처한 질문 하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근대 과학은 종교와 어떤 관계일까? 그동안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온갖 대답을 골백번도 넘게 했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는 500년 동안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남편은 여전히 신데렐라 같은 아내를 기대하고 아내는 계속 완벽한 남편을 갈망하면서, 쓰레기 버릴 차례가 누구냐를 놓고 싸운다.
- 2.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뜻밖의 한 쌍 p.250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은 깨지고 그 자리에 매우 다른 종류의 계약이 들어설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과 어떤 새로운 포스트 인본주의 종교 사이의 계약으로, 다음에 오는 두 개의 장에서는 근대에 맺어진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6. The Modern Covenant
근대의 계약


근대에 들어서며, 인본주의로 인간은 신의 자리를 위협합니다.

고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신과 같은 전능함을 거머쥐게 할 수 있지만, 의미가 사라지는 무의 심연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유혹인 동시에 위협인 ‘근대’라는 계약.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으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으며 이 계약을 취소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얼핏 보면 근대라는 계약은 엄청나게 복잡해서, 예컨대 당신이 어떤 소프트웨어를 다운받았는데 난해한 법률용어로 도배된 수십 쪽짜리 계약에 서명하라고 하는 경우와 같아, 우리는 쓱 한번 훑어보고는 곧장 마지막 페이지로 화면을 내려 ‘동의’란을 클릭하고는 그 계약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사실 근대는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으로,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죠.


근대 이후 사회는 경제성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근대 이후 경제성장은 이렇듯 거의 모든 종교, 이념, 시민운동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경제가 영원히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한가지 해법은 새로운 땅을 탐험하고 정복하는것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섬과 대륙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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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근대세계에 그 해법을 제공합니다.

세계를 크기가 고정된 파이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 세계에 오직 원재료와 에너지, 두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이 두가지에 지식이 더해집니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

한 세대가 지날때마다 과학은 새로운 에너지원, 새로운 원재료, 더 나은 기계장치, 새로운 생산방법을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2016년 현재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에너지와 원재료를 거머쥐었고, 생산량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근대는 인간집단에게 평형 상태가 혼돈보다 훨씬 더 무섭고, 탐욕은 성장의 원동력이므로 선한 힘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원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탐욕을 억제하던 오래된 규율들을 없애버렸고 그 결과 생겨난 불안을 상당 부분 달래준 것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였습니다.

이렇듯 근대 계약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힘을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졌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근대 계약은 우리가 힘을 얻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인간이 이 서늘한 요구에 따랐다면 아마 우리는 윤리, 미학, 동정이 없는 암흑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지만 지금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할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협력적이죠.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신, 천국, 지옥이 사라진 세계에서 도덕과 아름다움은 물론 동정까지도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인류를 구원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혁명적 종교인 인본주의였습니다.


7. The Humanist Revolution
인본주의 혁명

; 신이 주는 ‘의미’를 포기하고 과학을 통해 권능을 얻은 인간은 그 ‘의미’를 무엇으로 채웠을까요?


우주적 계획 같은 것은 없고, 우리가 신의 법칙이나 자연법칙을 믿지도 않게되었지만, 사회붕괴를 막아주는 무의미하고 무법적인 존재에게 해독제를 제공하며 사회붕괴를 막아준것은 인본주의로 이는 지난 몇백 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혁명적인 새 교리인것입니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합니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는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내적 자아는 단 하나라고 추정하지만, 막상 그 자아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침묵하는 목소리 또는 상충하는 목소리들의 불협화음과 맞닥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본주의는 권위의 새로운 원천과 그 권위를 이용해 진정한 지식을 얻는 새로운 방법을 공표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공식은 지식=성경×논리였습니다.

어떤 중요한 질문의 답을 알고 싶으면,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자신의 논리로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과학혁명은 지식에 대한 사뭇 다른 공식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지식=경험적 데이터×수학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의 답을 알고 싶으면, 그 질문과 관련한 경험적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 그 데이터를 분석할 필요가 있지만 이 공식에는 큰 결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여기에 대안을 제시했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서, 윤리적 지식을 획득하는 새로운 공식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지식=경험×감수성이죠.

만일 당신이 어떤 윤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한다면, 내면의 경험을 꺼내 예리한 감수성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는데 경험은 세 가지 주요 성분인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입니다.

특정 순간의 내 경험은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열, 쾌락, 긴장 등),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사랑, 두려움, 분노 등), 내 마음속에 떠오른 모든 생각으로 구성됩니다.

이와함께 감수성은 두 가지를 뜻하는데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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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불교 등 성공한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역시 서로 충돌 및 확산하며 여러 분파로 쪼개집니다.

모든 인본주의가 인간 경험을 가장 중요시하지만, 그 경험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사피엔스에서 다루었던 ①자유주의적 인본주의, ②사회주의적 인본주의, ③진화론적 인본주의가 바로 그것이죠.


패배와 좌절의 몇십 년을 겪은 뒤 자유주의는 냉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상처를 입긴 했어도 인본주의 종교전쟁에서 당당히 살아 돌아왔다.

- 2.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인본주의 혁명 p.368


인본주의는 크게 세갈래로 나뉩니다.

우선 정통파는 인간은 저마다 독자적인 내적 목소리와 재생 불가능한 일련의 경험을 소유하는 유일무이한 개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치든 경제든 예술이든, 국익이나 종교적 교의보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훨씬 큰 무게를 두고 개인이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세계는 더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이렇게 자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 정통 분파를 ‘자유 인본주의’ 또는 간단히 ‘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이어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인본주의가 사회적 신망과 정치적 힘을 얻으면서 서로 매우 다른 두 분파가 생겨나는데, 바로 수많은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와 나치를 가장 유명한 신봉자로 둔 진화론적 인본주의입니다.

이 두 분파는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 원천이라는 데는 동의했고 둘 다 초월적인 힘이나 신성한 경전을 믿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와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관심의 초점을 다른 사람들의 경험보다 자신의 감정에 둔다고 비난합니다.

사회주의는 나와 내 감정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합니다.

세계평화는 개별 민족의 독자성을 찬미할 때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할 때 달성되고, 사회화합은 각 개인이 자아도취에 빠져 자기 내면만을 탐구할 때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들의 필요와 경험을 우선시할 때 달성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남아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본론>을 읽을 시간에 인터넷과 인간 게놈을 공부하라고 할 것이다.

- 2.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인본주의 혁명 p.379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충돌하는 인간 경험의 문제에 대해 다른 해법을 갖고 있는데 다윈주의 진화론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멈추지 않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가 인권이나 인간 평등의 명목으로 최적자를 거세한다면, 초인간은커녕 호모 사피엔스의 쇠락과 멸종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초인간의 도래를 예고하는 우월한 인간들이란 어떤 인종일 수도 있고, 특정 부족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개별적인 천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더 뛰어난 능력들이고, 그런 능력들은 새로운 지식, 더 진보한 기술, 더 번영한 사회, 더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근대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21세기의 형성에는 더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 사이의 차이가 하찮아 보였지만 인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런 내부적 균열이 더 심해졌고, 결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종교전쟁으로 타올랐습니다.

저자는 21세기에 인간이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할 거라는 예측으로 시작했고 이 예측은 그리 독창적인 것도 대단한 선견지명도 아니고 단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전통적 이상들을 반영한 것일 뿐입니다.

인본주의가 인간의 생명, 감정, 욕망을 신성시한 지 오래되었음을 고려하면, 인본주의 문명이 앞으로 인간의 수명, 행복, 힘을 극대화하려 할 거라는 점은 불 보듯 훤합니다.


인간은 이 같은 허구적 질서에 대한 공동의 믿음을 기반으로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를 거쳐 인본주의가 지배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는 지금에 이르렀다는 게 이 책 2부까지의 이야기다.

작가는 3부에서 생명과학의 발달이 인본주의적 가치를 모두 궤멸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HOMO SAPIENS LOSES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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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e Time Bomb in the Laboratory
실험실의 시한폭탄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진화는 불멸의 영혼과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자유의지라는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자연선택이 인간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진화론에 따르면 동물들이 하는 모든 선택은(습관이든 음식이든 배우자이든) 그들의 유전암호를 반영한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실험실의 시한폭탄 p.389


21세기의 과학이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유주의의 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주의는 외적인 힘과 우연한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지만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대 과학은 영혼, 자아,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인간이 내리는 결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결정론적 반응이거나 무작위적 사건의 결과로 해석되고 이 과정은 유전자, 호르몬, 뉴런처럼 다른 모든 실재와 같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자유'는 실체를 밝힐 이유가 없는 상상 속의 존재가 되며 진화론은 자유의지라는 개념도 거부하게 됩니다.
이와함께 과학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도 약화시키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최근의 생명과학은 이것이 완전히 신화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내 이야기하는 자아가 지난날의 실수를 인정하려고 할 경우, 줄거리에 반전을 꾀해 실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실험실의 시한폭탄 p.417


당연하게 여겼던 이른바 단일한 실체는 상충하는 목소리들의 불협화음으로 흩어지며, 그중 어떤 것도 '나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인간은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의 'Cold-Hand Situation 찬물 실험'은 경험하는 자아(순간순간의 의식)와 이야기하는 자아(중요한, 극적인 순간과 최종 결과만을 이용해 이야기를 엮고, 이를 이용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최소 두 개의 자아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Thinking, Fast and Slow 생각에 관한 생각)

저자는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만든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함을 밝혀냈으며, 이는 자유주의의 근간을 흔들었고 지금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라는 철학적 개념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먼 미래에 과학적 통찰 등이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되면 자유주의는 붕괴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종교적 믿음과 정치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9. The Great Decoupling
중대한 분리


자유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의지의 선택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21세기에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게 되어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것이고,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그렇지 않고 일부 upgrade된 새로운 일부 엘리트 집단에게서만 가치를 발견하는 3가지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것입니다.


오래된 금언을 따라 '자신을 알고' 싶다면, 철학, 명상, 심리분석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생체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알고리즘에게 분석을 맡겨야 한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중대한 분리 중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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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념이 된 것은 오류 없는 철학적 논증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가 단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입니다.

권리에 위해 고취된 동기와 진취적 정신이 전쟁터나 공장에서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죠.

그러나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잃을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로도 기계화가 대량실업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기계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항상 있었기 때문었지만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뛰어넘는다면 자유주의 철학의 근간을 흔드는 과학적 발견의 실질적인 위협이 될것입니다.

자유주의가 직면한 두번째 위협은 시스템이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거라는 점으로 시스템이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대신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고, 개인들에게서 권한과 자유를 박탈할 것입니다.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알고리즘이 옳은 결정을 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권한을 넘겨줄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데이터베이스는 커질것이고, 통계는 더 정확해질 것이고, 알고리즘은 더 개선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만 하면 그날로 자유주의는 붕괴할 것이고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아는 신탁이 되면, 그 다음에는 대리인으로 진화하고 마침내 주권자로 진화할 것입니다.

세번째 위협은 해독불가능한 소규모 특권집단으로 자유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경험의 평등이 아닌 다른 경험에 대한 평등한 가치의 부여입니다.

20세기 의학은 대중의 병 치료라는 평등적 목표였으나 21세기 의학은 건강의 upgrade 이며 이것은 일부 개인들에게 우위를 제공하려는 엘리트주의적 목표가 되는것입니다.


유럽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스페인 정복자들과 상인들은 색깔 있는 구슬들을 주고 섬과 나라를 통째로 샀다.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값진 자료는 아마 개인적 데이터베이스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이메일 서비스와 웃긴 동영상을 제공받는 대가로 첨단 기술기업에게 그 데이터를 넘기고 있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중대한 분리 중 p.467


10. The Ocean of Consciousness
의식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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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실리콘밸리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로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 둘로 나뉠것입니다.

기술 인본주의는 기술을 통해 창조되는 훨씬 우수한 인간모델 (호모 데우스)로 두번째 인지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새로운 영역에 접근하고 은하계의 주인이 될거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1세기전 선택적 육종과 인종청소를 통해 창조하려했던 초인간의 꿈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루려는 것입니다.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upgrade해 새로운 경험과 의식상태에 접근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마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게다가 지난 백년동안 심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연구한 대상도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로 WEIRD(서구의 많이 배우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적인) 사회 구성원들에 국한되어왔고 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몸과 뇌의 upgrade는 혹 성공한다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어 인간을 downgrade할 것입니다.

기술 진보는 우리의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어 그 목소리를 통제하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재설계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의지를 모든 의미와 원천이라고 간주할 수 없을 것이고 이 지점에서 기술 인본주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봉착하며, 더 과감한 기술종교는 인본주의의 탯줄을 아예 끊으려 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욕망과 경험을 대신할 권위의 원천은 바로 정보입니다.


두 번째 인지혁명은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지만,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를 생산할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의식의 바다 중 p.497


11. The Data Religion
데이터교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지고 어떤 것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하는데 이 개념은 진화론에 기반해 유기체를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보는 생명과학과 점점 더 정교한 전자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컴퓨터 과학자들이 함께 하는것입니다.

데이터교는 이 둘을 합치면서 똑같은 수학적 법칙들이 두 알고리즘에 적용된다고 지적하면서, 동물과 기계의 장벽을 허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비대한 정부관료 조직은 밀려드는 데이터로 뭘 해야할지 몰라, 계속해서 어설프게 일을 망치고 있습니다.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데이터교도 시작은 가치중립적 과학이론이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의 자유가 중요하한데, 오래된 자유주의와는 달리, 정보의 자유는 인간이 아닌 정보 자체에 주어집니다.

이미 점점 많은 예술과 과학창조물이 모든 사람의 협업으로 생산됩니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세계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계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데이터교는 자유주의적이지도 인본주의적이지도 않지만, 인간의 경험에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고 단지 그 경험 자체에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만물 인터넷을 만들려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고 강하게 해줄거라는 기대때문인데, 실제로 운용되면 우리는 엔지니어에서 칩으로, 그 다음에는 데이터로 전락하여 데이터 급류에 휩쓸려 흩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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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권자들은 권력이 유럽연합으로 이동했을 거라 생각하고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미국 유권자들은 기득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고 생각하고 비기득권 후보자들인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다. 하지만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3.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데이터교 중 p.513


결말 부분에선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시나리오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이런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며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점점 신에 가까운 능력을 얻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신의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리고 적절한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게끔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를 통해 있음직한 미래의 방향성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의 의미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술의 발견과 그 개발 과정을 목격하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인류가 기술을 활용하여 천국을 건설할까 아니면 지옥을 건설할까라는 갈림길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인류가 아닌, 역사의 목격자이자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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