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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May 12. 2024

일반인문CCXXX 野雪, 누군가의 이정표

; 백범 선생의 애송시를 읖조리며…

중학교시절, 일주일에 3번은 한시간 가량의 조회가 있었습니다.

매번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버텨내야할 지루함이었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시간이 훌쩍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내용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한가지가 눈 오는날, 눈에 난 발자국이 바르길 바란다면 먼곳을 바라보며 걸어야한다는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등교할때건, 출근할때건  거의 첫번째로 도착했던 나는 눈 오는 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늘 볼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본다면 이를 따라 걷곤 했습니다.

눈 아래 어떤 위험요소가 있을지 모르니 이를 따라 가는것이죠.

그만큼 첫 발자국이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로 백범 김구 선생도 좌우명으로 애송한 시가 있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천설야중거 불수호난행
今朝我行跡 遂爲後人程 금조아행적 수작후인정


雪朝野中行 開路自我始 설조야중행 개로자아시
不敢少逶迤 恐誤後來子 불감소위이 공오후내자


눈 밟고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엔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오늘 아침 내가 간 발자국들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눈 온 아침 들 가운데 걸어가노니 나로부터 길을 엶이 시작 되누나.
잠시도 구불구불 걷지 않음은 뒷사람 헛갈릴까 염려해서네.


이 시는 사명대사나 김구 선생의 시로 알려져 있으나 와전된 것입니다.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작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1985년에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한 <한시집> 안에도 이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책에는 제목은 야설(野雪), 지은이는 임연 이양연(李亮淵 - 이량연이라고 읽기도 합니다)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는 '임연당별집 臨淵堂別集'과 1917년에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이 시가 순조 때 활동한 시인 이양연의 작품으로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짧은 시에 촌철살인의 시상을 멋지게 펼쳐내고, 따뜻한 인간미와 깊은 사유를 잘 담아내는 이양연의 전형적인 시풍을 보여줍니다.


프랑스어로 가장 앞의 부대를 뜻하는 Avant-Garde 아방가르드가 실험적인 전위예술을 의미하는 것처럼 '앞'이라는 자리는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많은 고난을 헤쳐가야 하는 막중한 무게가 걸리는 자리입니다.


한자를 보면 前(앞 전)은 금문체에서 보듯 원래 발을 뜻하는 止지와 대야를 나타내는 皿(그릇 명)이 결합된 형태로 제사를 지내는 종묘에 들어서기에 앞서, 먼저 발을 물에 담가 씻어야 한다는 데에서 '앞'의 의미가 생겨난 이후 刂(칼 도)를 더해 '자르다'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여, 발을 씻는 것이 곧 그 걸음을 단정하고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일 테니 임연 시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합니다.


지혜의 신인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깃들 무렵 날갯짓을 시작하듯, 모든 철학적 사유와 그 결과물인 지혜는 처음부터 선취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현실의 경험을 통해 인식되고 이해되어지는 것이죠.


임연의 시처럼 눈밭에 남긴 발자국이 눈길을 헤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될것인지라 반추해 봅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똑바로 걷자. 혹시라도 내 행로가 뒤에 올 누군가의 행로를 비틀거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똑바로 살자. 내 인생이 다른 인생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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