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비운의 왕, 광해 마지막
비참하게 맞이한 마지막과 풀어지지 않은 한
광해의 기록은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어렵게 드러나는 일화를 들추다보면 폐위된것에 그치지 않고 주변으로 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燃藜室記述 연려실기술(조선후기학자 李肯翊이긍익이 지은 조선시대 史書사서)에 의하면 이괄의 난(1624년)때 한양으로 몰려온 이 괄의 군대를 피해 인조는 공주로 도주하고 광해군은 일시 충청도 태안으로 피신 한일이 있었다.
그를 압송해서 태안으로 호송한 나졸들은 자기들은 안방에서 자고 광해군은 작은 방에서 재우는 수모를 주었다.
1637년 제주로 이배온 광해는 제주도에서도 쓰라린 생활은 계속되었다.
제주도에서 당했던 수모의 한 조각.
유배소의 계집종이 왕년의 상감이었던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회 최하류 계층이 광해를 이렇게 함부로 불렀으니 평소 광해군이 당한 수모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은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광해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꿋꿋이 참았다고 했다.
그에 비해 제주 목사들이 내놓고 학대했다는 기록은 찯을 수 없다.
광해군 말년에 제주 목사 李時昉이시방(본관은 연안延安,호는 서봉西峯,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이 광해군을 각별하게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말년에 노쇠해진 광해군에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일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이시방은 반정군에 말석으로 참가헸던 반정인사였다.
광해군에 대한 반정 패거리중에 유일하게 베푼 마지막 인정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67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죽기전 자기가 죽으면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아직 어렸을 때인 2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목사 이 시방이 광해군의 부음을 듣고 달려 가보니 계집종이 이미 싸늘하게 식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하고 있었다한다.
시신이 상할 것을 염려한 이 시방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지시가 있기전 즉시 상복을 입고 상을 치뤘다.
인조는 예조 참의를 보내서 예를 표하고 그 해 9월 그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해서 매장했다.
그리고 광해의 생존했던 딸에게 물질적인 특전을 베풀고 광해군의 외손들이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것이 그가 광해군에게 표했던 마지막이자 최대의 호의였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용골대와 마부대가 별동대를 몰고 내려오면서 바람처럼 통과했던 파주군의 長陵장릉에 모셔있다.
왕가의 불량배로 악평이 자자했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도 김포의 章陵장릉이라는 왕의 능에 안치되어 있다.
어떻게 되었건 행운으로 왕이 된 아들덕분에 입금의 묘소에 능이라는 칭호가 붙은 장릉이라고하여 능답게 묘역도 넓고 호화스럽다.
김포는 청군이 처들어 왔다는 경악스러운 정보에 수만의 백성들이 강화도로 달려갔던 길목이다.
강화도 방어 사령관인 金慶徵김경징(본관은 順天순천,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靖社功臣정사공신 2등이 되고, 順興君순흥군에 책봉)이 식량 때문에 입도를 허락지 않아 해협 주변에 몰려 있던 수만의 난민들은 추격해온 청군에게 도륙당하고 능욕당하고 납치되었다.
인조와 그 아버지의 호화로운 두 묘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엮은 역사의 길목에 자리 잡은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광해군의 묘.
인욕의 세월을 참고 버티다가 쓸쓸히 간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자 일찌감치 세상을 떴던 부인과 같이 합장되어 있어 묘는 쌍분이다.
인조 부자의 능과 달리 광해군의 묘는 초라하고 작은 것은 물론 접근조차도 힘들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의 무리들에게 철저히 매도당하고 격하 당했다.
대조되는 묘의 위상은 이러한 그의 위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악화 될 대로 악화 된 그의 이미지는 너무 나빠서 노산군이 복위되어 단종으로 추증 되었는데도 그는 광기를 부리다가 타도 된 폭군 연산군과 같이 동급의 인물로 평가되어 조선 왕조 내내 그를 추증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다